영화|애니|TV
-
장선우의 '성공시대'영화|애니|TV 2007. 10. 17. 05:19
대단하다. 그 말밖엔 안나온다. 20년전 영화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발상과 실험적인 연출력을 보여준다. 장선우의 실질적인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의 천재성을 만천하에 똑똑히 입증해 보인다. 화질이 구리고, 표현방식 또한 지금보면 촌스럽지만, 이 영화가 가진 생명력까지 빛을 잃는 건 아니다. 성공을 쫓는 인간의 야망과 처세, 그리고 전쟁과도 같은 기업 생리를 풍자적으로 묘사해낸 솜씨는 지금도 유효하다. 시대를 담아낸 영화이자 시대를 예측한 고전인 셈이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그는 5년간 걸작들을 쏟아냈다. 젊은 안성기의 날이 선 모습은 마치 양조위를 보는 듯 하고, 이혜영 역시 지금의 대찬 느낌보단 풋풋한 매력이 있다. 그 외 정성모, 여균동, 나한일, 김나운, 정부미, 김의..
-
닐 조단의 '브레이브 원'영화|애니|TV 2007. 10. 15. 05:07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퍼지며, 역풍으로 내쇼널리즘과 테러리즘도 불어온다. 아니, 이런 얘기 다 필요없다. 어차피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 이데올로기고 테레리즘이고 힘있는 자들이 패권을 잡는 곳이니까. 살아남기 위해선 내 힘을 보여줘야 한다. 협박과 과시가 아닌 현실적인 방법으로 위계질서를 잡아 나가야 한다. 내가 약자인 순간 잡아먹힐 게 뻔하니. 자경단 영화는 그런 면에서 불편하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통쾌하다. 닐 조단의 신작은 자경단 영화임을 숨기지 않는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방어 수단으로 구입한 총은 자기 심정과 달리 어느새 정의의 권력으로 변모한다. 복수는 힘을 필요로 하고, 힘은 야욕을 부른다. 주체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 약자는 멈춰야 할 곳을 모른다. 남는 건 이..
-
브렛 레트너의 '러시아워 3'영화|애니|TV 2007. 9. 25. 03:03
추석이 되면 떠오르는 반가운 얼굴, 성룡이 돌아왔다. [러시아워 3]로. 늘어난 주름살과 조금 불은 얼굴살이 비록 예전의 날렵했던 느낌과는 많이 다르지만, 이 얼굴 추석 때 안 보면 왠지 섭할 거 같다. 크리스마스에 만나는 언제나 10살 맥컬리 컬킨처럼. 영화는 딱히 만족스럽지 않지만, 성룡 영화라는 메리트 하나로 볼 만 했다. 크리스 터커의 입담과 재기 넘치는 오두방정은 무뎌졌다. 6년간 출연작이 없었으니까. 브렛 레트너의 연출력은 여전히 쉣더뻑업이고. 그냥 [프리즌 브렑] 제작에 열심히 정진해주시길. 나름대로 80~90년대 버디 액션 무비를 떠올리게 만들던 1편의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나다 히로유키나 로만 폴란스키, 막스 폰 시도우라는 이름값이 아까울 따름. 시나리오는 갈 길을 잃..
-
마이클 만의 '인사이더'영화|애니|TV 2007. 9. 21. 19:05
몇번씩 보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연례 행사처럼. 볼 때마다 새롭고, 감탄하며, 음미하곤 한다. 내게 [인사이더]는 그런 영화다. 99년 개봉한 이례 꾸준히 그래왔다. 미니멀하면서도 힘 있고, 묵직한 맛이 배가 되는 뚝배기 같은 영화.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꾹 쥐어지곤 한다. 물론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들이 대체적으로 그러하지만, [인사이더]는 인상적인 액션이나 비주얼적인 시퀀스 자체가 없음에도 더 자주 보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시종일관 인물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담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두 캐릭터의 고뇌를 그려낸다. 얼굴은 감정의 창이다. 그러나 알 파치노와 러셀 크로우는 풍부한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피곤에 젖은 눈과 답답함에 꾹 다문 입술의 무표..
-
폴 그린그래스의 '본 얼티메이텀'영화|애니|TV 2007. 9. 21. 03:45
본 시리즈가 마침내 최종장에 도달했다. 로버트 러들럼 원작의 궤적에 따르면. 하지만 영화는 엄연히 소설과 다르다. 본의 기억 찾기는 끝이 났지만 흥행에 비춰본다면 이제부터가 시작이 될지 모른다. 사람들은 그 빌어먹을 인기를 가만 놔두지 않으니까. [본 얼티메이텀]은 영리한 영화다. 1편과 2편이 쌓아왔던 길을 고스란히 밟으며 욕심 부리지 않고 끝을 향해 묵직하게 나아간다. 추적이라는 기본 테마에 방점을 찍고, 현실감 넘치는 긴장을 선사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본은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쫓고, CIA는 그런 본을 쫓고. 구조와 이야기는 모두 그런 추적 구조를 효과적으로 쌓아올리기 위해 존재할 뿐, 그 외 상황들은 모두 맥거핀이다. 단순하지만 다이나믹하고, 직선적이며 또 효과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본 ..
-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영화|애니|TV 2007. 9. 14. 18:53
타란티노의 키워드는 '비짜'다. 이른바 B급이라 부르는 서브 컬쳐에 대한 광대한 이해와 자기 소화력. 그게 그의 영화의 힘이다. 하위 문화의 재조합을 통해 '어디서 본듯하지만 전혀 본 적없는' 생경한 데자뷔 현상을 만들어내는 타란티노의 방식은 기존 장르 컨벤션과 룰을 뒤집는 90년대식 누벨바그였고, 할리우드 혁명이었다. 아무도 신경 안쓰던 잡스러우면서도 상스러운 수다, 엉성하지만 자극적인 플롯, 상상초월의(그것이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간에) 비주얼 쾌감이 어울러지는 싸구려 대중성에 경도돼 영화계의 뒤샹이자 앤디 워홀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2007년, 여전히 타란티노는 타란티노다. 그 옆엔 여전히 절친한 동료 로드리게스가 있으며, 그들은 여전히 장난스럽고도 재기발랄하며 하고픈 영화를 만든다. [데쓰 ..
-
브래드 버드의 '라따뚜이'영화|애니|TV 2007. 8. 6. 03:09
브래드 버드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뛰어난 애니매이터이자 기술적 완성도를 중시 여기는 연출자지만, 무엇보다 이야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론 많은 연출자들이 잘 못하는 부분! 대중적인 취향만큼 광범위하고 무분별한 범위가 또 어디 있는가. 더군다나 관객들은 변덕쟁이다. 이 비유를 고루고루 잘 맞춰준다는 거야말로 최고의 감각과 능력인 셈. 브래드 버드는 바로 이 혜안을 갖추고 있다. [라따뚜이]는 이제 그가 정점에 올라섰음을 증명해 보인다. [아이언 자이언트]나 [인크레더블]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강력한 훅의 설정과 끝을 궁금하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구성, 그리고 생생한 캐릭터가 삼위일체해 화려한 프랑스 요리 코스만큼 버라이어블한 이야기의 향연을 보여준다. 이제는 ..
-
미카엘 하프스트롬의 '1408'영화|애니|TV 2007. 8. 5. 03:38
스티븐 킹의 단편을 원작으로 삼은 이 영화는 대단한 야심 하나 느끼지지 않지만, 매끈하게 잘 뽑아진 소품이다. 설정의 훅(Hook)은 어디선가 많이 들은 듯 친숙하지만 강력하고, 공포의 완급조절을 효과적으로 해나가는 미카엘의 연출력 또한 탁월하다. 가히 1인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분주히 광기와 현실 사이를 오가는 존 쿠샥의 열연이 눈에 띄며, 짧은 분량이지만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샤뮤엘 L. 잭슨 역시 최고다. 모든 조합들이 훌륭하게 어우러졌다고나 할까. 고어적 효과가 적은 편이라 그간 트렌드처럼 쏟아지던 고어틱한 호러물들에 비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귀신들린 집의 장르적 컨벤션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고, 킹 월드의 단초들을(샤이닝, 공포의 애완동물묘지, 나이트 플라이어 등)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