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애니|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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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우의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 '영화|애니|TV 2009. 12. 1. 04:00
각색은 필요악이다. 영화화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과정이지만, 그 각색이 원작을 갉아먹기 때문에. 성공을 위해 택한 변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성공을 가로막는다. 잘 되면 본전, 대부분은 쪽박. 재조립의 길은 항상 어렵다. 900 페이지 분량에, 20년에 가까운 시간, 방대한 인물이 쏟아져 나오는 [백야행]을 두 시간짜리 영화로 만들기 위해 변신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요체는 그 변신한 모습이 잘못됐다는 데 있다. 소설은 이기적이라 할 만큼 차겁고 드라이했고, 일드는 닭살 돋지만 눈물 빼는 신파 멜로였다. 영화는? 시간에 쫓겨 분위기만 조성하다 멍청해졌을 뿐이다. 문어체적인 대사는 어색하고, 칼처럼 날이 선 캐릭터들은 무뎌졌으며, 계속된 백조의 호수는 거슬린다. 좋은 배우와 스탭들을 데리고도 그 역량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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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맥티그의 '닌자 어쌔신'영화|애니|TV 2009. 11. 30. 00:37
아메리칸 닌자의 부활인가. 노우. 코리안 닌자다. 캐스팅 명단만 훑어봐도 닌자의 나라 일본보다 한국인이 더 많다. 아무렴 어때. 머리 까만 동양인이면 되지. 아니 차라리 전 세계 각국 고아를 불러모아 세계 속의 닌자를 양성하는 거야. 이 심보로 만든 전형적인 할리우드 오리엔탈리즘 시각의 이 액션 판타지는 국가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별 신경쓰지 않는다. 하물며 여기에 등장하는 닌자조차도 슈퍼히어로의 변종일뿐, 그 오리지널리티와 매력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뻔한 클리셰들로 뒤얽힌 습자지같이 얄팍한 줄거리의 이 영화에서 남는 건 오로지 피칠갑 고어의 향연이 된 액션뿐. 정신없이 난도질되어 가는 프로틴 덩어리와 헤모글로빈의 홍수 속에서 그저 아드레날린을 방출하는 묘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물론 비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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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영화|애니|TV 2009. 11. 27. 23:12
떠나는 자는 말이 없다. 남겨진 자는 의문을 갖는다. 그들이 던지고 간 일상의 수수께끼를 과연 풀 수 있을까. 아니. 영영 해답은 없다. 살아가는 내내 그 화두는 잊혀졌다 떠올랐다를 반복하며 남은 자들을 괴롭히지만, 결코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추측과 예상만이 그려질 뿐, 막상 내게 아름다운 한줄기 빛이 내려와 저 바다로, 철길로 끌어당긴다 해도 떠나는 그 순간에도 답을 알 순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풍광과 일상의 세밀한 묘사로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부재의 고통'을 담아내는 조용한 강렬함은 [환상의 빛]이 가진 힘이다. 부차한 설명과 뚜렷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아도 우리 곁에 만연한 죽음의 일상은 언제나 납득하기 어렵다. 부재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익숙함은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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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영화|애니|TV 2009. 11. 24. 23:15
물 속에서 평온하게 부유하는 해파리의 독은 치명적이다. 천사의 모습으로 악마의 기운을 품고 있는 그런 이중성이야말로 구로사와 기요시가 포착한 젊음이다. 나른하면서도 몽롱한 현실감각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며 제목과 달리 막막하고 정체된 소통단절의 초상을 담담하니 담아낸다. 그럼에도 부유하는 청춘은 서서히 강물에서 바다로 나아가는데, 그 시간의 흐름을 통한 성장에서 소통하려는 의지를 읽어내고 밝음을 이야기한다. 여러 작품을 통해 인간 본연의 기저에서 심리적 공포감을 탁월히 뽑아낸 바 있는 그이기에 젊음의 불안하고 미성숙한 감정의 폭발을 섬세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오다리기 죠와 아사노 타다노부의 만남도 화제였지만, 무엇보다 다양한 메타포와 미장센을 보여주며 정적이면서도 과잉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밀레니엄 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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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금발이 너무해'영화|애니|TV 2009. 11. 21. 23:34
차겁고 도도한 마력(?)의 싴병장표 핑크공주 엘 우즈를 보고 싶었지만, 12월 중순부터라는 말에 좌절, 그냥 얌전히 평일표로 다녀왔다. 유난히도 호들갑스럽고 사카린을 한 입에 털어넣은 듯한 원작에 무지 닭살이 돋았던 터라 걱정(?) 아닌 걱정을 했지만, 의외로 그런 분위기가 영화보다 뮤지컬이란 장르에 더 잘 어울렸기에 부담없이 즐기다 왔다. 유쾌한 노래들과 위트있는 대사들이 아기자기하게 얽혀 아이스크림 매장 속 체리 쥬빌레를 맛 본 것과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머리 속에 남은 건 2막이 시작할 때 객석으로 서둘러 들어가던 싴병장의 모습뿐! 오 마이 갓!! 바로 코 앞에서!! 싴병장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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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쇼헤이의 '작은 오빠'영화|애니|TV 2009. 11. 20. 23:50
특유의 시니컬한 블랙 유머와 냉철하기 그지없는 사회인류학적인 시선을 잠시 거둬둔 채 따스한 감성으로 그 때 그 시절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네오 리얼리즘 색채의 영화. 이마무라 쇼헤이의 초기작으로 강렬한 화두와 주제 의식없이도 보는 이를 잡아당기는 은은한 마력이 일품이다. 그건 마치 예전의 [육남매] 드라마를 보듯 아릿한 기시감의 향수와 흰 쌀밥만 먹어도 배불렀던 과거의 진지하면서도 가슴 아픈 사연의 진솔함이 구김살없이 담담하게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 담긴 시대의 아픔은 여전히 현재에서도 반복되며 곱씹을 가치에 대해 은연중에 드러내는데, 좋은 영화가 가진 힘은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앞서 그의 다른 작품인 [여현]과 [도둑맞은 욕정]을 놓쳐 안타까웠는데, 별 기대하지 않았던 이번 상영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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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랜드 에머리히의 '2012'영화|애니|TV 2009. 11. 17. 23:11
반담과 룬드그렌의 소박한 발차기로 시작했던 그의 할리우드 이력의 정점은 지구 파괴 혹은 지구 멸망으로 귀결되었다. 외계인 침공이던, 고질라가 짓밟던, 날씨가 지랄을 떨던, 태양 중성미자의 영향이던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부셔대는 그의 공격성(!)은 나날이 업그레이드되어 이젠 할리우드 막강 파괴의 신답게 아낌없이 지구를 반파해간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스케일! 세계 명소가 부셔지는 건 양념, 이젠 지각까지 움직여대며 세계 지도를 바꿔나간다. 다음엔 도대체 무엇을 얼마만큼 부셔댈지 쬐금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 빼앗긴 개념을 찾아 우주 저 멀리 안드로메다마저 뒤흔들지나 않을런지 궁금하다. (차기작으로 인디펜던트 데이 속편을 운운하는 걸 보니 감독 자신도 지구상에선 볼짱 다 봤다는 심산인 듯...-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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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소고의 '꿈의 미로'영화|애니|TV 2009. 11. 17. 19:00
몽환적이고 탐미적이다. 짧은 일본 고전 기담을 읽듯 은은하게 올라오는 서늘함과 정갈한 색기가 조용히 어우러진다. 강렬한 흑백 대비가 만들어낸 인생의 암(暗)과 명(明)의 뚜렷한 이미지들은 잘 골라 의미를 꽉꽉 눌러 채운 시어(詩語)처럼 망막에 알알이 박힌다. 뜨거운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위험한 사랑을 감수한 여성의 적극적인 모험담은 파괴와 허무에 도취되는 일본 특유의 미학과도 맞닿아있다. 설명을 가급적 배제한 채 긴장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이시이 소고의 탄탄한 연출력과 여백의 감성은 아름답다. 꿈 속을 헤매듯 긴 터널을 빠져나와 마주치는 빛의 스펙트럼에 현실감을 잃고 방향을 더듬이는 코미네 레나의 모습도 잊을 수 없고. 타다노부는 그냥 타다노부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