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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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이의 소풍의 '천천히 다가와'책|만화|음악 2012. 5. 2. 12:59
인생 참 맘대로 안된다. 계획한대로,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잔인하게도 삶은 투자한 만큼 이익률을 볼 수 없는, 그렇다고 로또가 터질 확률도 아주 없지 않은, 신의 윷놀이판과 같다. 사실 그 예측할 수 없는 랜덤성 때문에 재미와 감동(심지어 아픔과 고통까지도) 배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 유발이도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프랑스에서 음악 공부 삼매경에 빠졌어야 하지만, 현실은 컨템포러리 재즈 밴드 '흠 Heum'의 피아니스트 겸 유일한 여자 멤버인 동시에 프로젝트성 그룹 '유발이의 소풍' 리더로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유려한 멜로디에, 독특한 애수를 지닌 분위기, 탄탄한 실력이 어우러져 웨이브나 윈터플레이, 푸딩의 뒤를 이을 재목이라 생각했던 '흠'의 멤버라면 '유발이의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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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령의 'I'm fine'책|만화|음악 2012. 4. 29. 17:50
김보령의 데뷔 싱글 'I'm fine'을 듣고 있으니 문득 오쿠 하나코가 떠올랐다. 물론 이 둘은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졌다. 키보드 하나에 청아한 목소리를 꾹꾹 눌러담아 진성으로 낭창낭창하게 부르는 하나코와 달리, 김보령의 목소리는 중저음역대에 나긋나긋하지만 조금은 허스키한 탁성의 가성을 오가는 편이다.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둘을 공통적으로 묶게 만들었던 건 두 가수 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단촐한 편성임에도 세련된 곡메이킹에, 진솔한 감정을 담백하니 담아 노래하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라는 점 때문이었다. 하나코처럼 직접 키보드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히키가타리ひきがたり까지는 아니지만, 홍대 인디 밴드와 코러스, OST에 참여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온 김보령은 신인답지 않은 여유와 색깔을 가졌다. 15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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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준, 최희진의 '김성근 그리고 SK와이번스'책|만화|음악 2012. 4. 18. 02:50
야구에 눈을 뜬 건 MBC 청룡을 응원하던 형 때문이었다. 물론 팀을 바꾸게 된 것 또한 형 때문이었고.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별 시덥지 않은 문제로 쌈박질을 하고 형과는 절대 같은 팀을 응원하지 않겠다는 월하의 맹세를 하며 별 연고도 없던 - 그저 장효조 이만수 김성래의 막강 화력 클린업 트리오에 반해 삼성으로 갈아탔었다. 유치한 발상에서 나온 선택이었지만 그 후 25년간 이 팀을 응원하고 있으니 사람 인생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990년 MBC에서 막 바뀐 LG와 삼성 간의 한국시리즈는 그래서 우리 형제에겐 일종의 자존심 승부가 걸린 대리전 양상을 띄었는데, 허무하게도 4연패로 지고 며칠간 눈물을 삭히며 질풍노도의 시기를 인고의 나날로 보내야만 했었다. 그리고 12간지가 한바퀴 돌아 마침내 찾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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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빈의 '만나게 될거야'책|만화|음악 2012. 3. 26. 02:24
좋은 책과의 만남은 좋은 여행의 느낌과 비슷하다. 책장을 넘겨 점점 활자에 빠져들며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마음은 낯선 여행지에 내려 그 골목의 향기, 생소한 말투의 언어, 이국적인 풍광에 젖어들며 발을 내딛는 기분과 많이 닮았다. 처음멘 어색하고 두렵고 집중도 안되는 산만함의 연속이지만, 점점 그 속에 적응해가며 녹아들수록 그 세계는 내 것이 되어간다. 그리고 내가 아는 세계는 그만큼 넓어진다. 게다가 그간 자기본위로 받아들이던 시각을 털어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 비밀의 시공간과의 조우는 다양하고 독특한 충격과 감동을 안긴다. 책과 여행은 성찰이자 고해(告解)고, 이면의 기록인 동시에 활력소다. 이를 한번에 접할 수 있는 여행기나 견문록은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경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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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D. 멕케르트의 '화폐 트라우마'책|만화|음악 2012. 3. 4. 16:09
경제학이라면 치를 떨었다. 고딩시절 가장 싫어했던 과목도 정치경제였다. 왜 이깟 속물들의 숫자 놀음에 내 푸르디 푸른 젊음을 할애하며 장단 맞춰야 하나 화가 나기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질풍노도의 혈기로 북경호랑이를 때려잡고, 청룡언월도를 철근같이 잘근잘근 씹어먹으며, 달리는 적토마에서 뛰어내려 창대한 꿈을 포효하던 그 시절, 이런 돈놀음쯤이야 의리와 우정, 사랑과 정의 앞에선 철저히 무릎 꿇을 거라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사정도 변했고. 그때 나이의 따블쯤 먹고나니 이노무 세상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다. 동화 속의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라는 해피엔딩 따윈 재벌이 독점한지 오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우리네 인생 런어웨이에선 일일연속극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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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열의 '유럽, 작은 마을 여행기'책|만화|음악 2012. 2. 26. 17:04
마음이 울적하고 지칠 때, 혹은 결딜 수 없이 무료한 일상의 무게에 숨이 막힐 때, 집을 나서 아무 버스에 올라탄다. 지하철도 괜찮다. 될 수 있으면 듣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번호나 익숙하지 않은 노선 색깔을 추천한다. 그렇게 내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 전혀 가보지 않았던 지명의 역 앞에서 내려 마음이 가는 출구로 나가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평범한 주택가일 수도, 시끄러운 공장 주변일 수도 있고, 학생들과 주점으로 가득찬 대학가일 때도, 외국인 노동자와 취한 자들이 휘청대는 우범지대일 때도 있다. 더울 땐 아이스크림 하나 손에 쥐고, 추울 땐 붕어빵에 호떡, 혹은 포장마자에서 따라주던 종이컵의 오뎅 국물을 추천한다. 그렇게 돌다 힘들면 옛날 목욕탕에 들러 한가한 오후의 때를 벗겨내도 되고, 낡은 오락실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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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의 '판을 엎어라'책|만화|음악 2012. 2. 7. 22:51
가로 세로 19줄씩 모두 361점으로 이루어진 나무판 위에서 검은 돌과 흰 돌로 서로 번갈아 두며 집을 많이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바둑은 서양의 체스와 함께 그 안에 담긴 오묘한 지략과 드라마틱한 흥망성쇠로 인해 마치 인생 여정에 비유되며 인격수양과 심신안정에도 도움이 되는, 지상 최고의 게임이자 지적인 스포츠다. 국내에도 이미 500만명이 넘는 아마츄어 동호인과 200명이 넘는 프로 기사를 두고 있는데, 높은 인기와 폭넓은 저변 그리고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다는 편견 또한 짙은 편이다. 일본에선 어린 바둑기사가 명인의 도움을 받아 활약하는 [히카루의 바둑(고스트바둑왕)]이란 만화로 어린 팬덤이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했다고 하는데, 정작 실제로 이런 어린 천재기사들 즐비했던(9살에 입단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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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선의 '화해'책|만화|음악 2012. 2. 2. 04:32
수정선. 그의 1집 앨범을 들었다. 한국에도 '수'씨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하는 마음에 웹 검색을 해보니 정말 존재하고 있었다. 남쪽에만 120명 가량. 와! 그 가운데 한 사람과 만나는 건가. 놀라운 마음으로 그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살펴보니 진짜 이름이 아니란다. 애써 검색한 내 노력이 검연쩍게시리도. 그러나 그 숨은 의미는 아주 예뻤다. 수정(水晶)으로 만들어진 배(船)란 뜻의 수정선. 바로 신재진의 원맨 밴드였다. 아름다운 이름만큼이나 서정적이고 찬란한 음악으로 무장한 그는 많은 인기와 관심을 갖진 못했지만 가능성을 알린 인디락밴드 '잔향'의 멤버 출신이었다. 라디오헤드와 콜드플레이를 적절히 믹스시켜 놓은 것 같은 침전되고 몽환적이며 다크한 기운을 뽑아내던 그들은 비록 데뷔 EP와 정규 1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