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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선의 '화해'
    책|만화|음악 2012. 2. 2. 04:32

    수정선. 그의 1집 앨범을 들었다. 한국에도 '수'씨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하는 마음에 웹 검색을 해보니 정말 존재하고 있었다. 남쪽에만 120명 가량. 와! 그 가운데 한 사람과 만나는 건가. 놀라운 마음으로 그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살펴보니 진짜 이름이 아니란다. 애써 검색한 내 노력이 검연쩍게시리도. 그러나 그 숨은 의미는 아주 예뻤다. 수정(水晶)으로 만들어진 배(船)란 뜻의 수정선. 바로 신재진의 원맨 밴드였다. 아름다운 이름만큼이나 서정적이고 찬란한 음악으로 무장한 그는 많은 인기와 관심을 갖진 못했지만 가능성을 알린 인디락밴드 '잔향'의 멤버 출신이었다. 라디오헤드와 콜드플레이를 적절히 믹스시켜 놓은 것 같은 침전되고 몽환적이며 다크한 기운을 뽑아내던 그들은 비록 데뷔 EP와 정규 1집, 총 2장의 앨범을 내고 쓸쓸히 아무도 모르게 좌초해버렸지만, 그 밴드 이름다운 깊은 '잔향'이 남아 지금의 '수정선' 사운드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처연하면서도 아름답고, 을시년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성을 간직한 신재진의 깊은 그림자는 8년이라는 그윽한 시간을 보내며 희석되어 브라운 톤의 슬픈 향기를 지닌 포크/모던락으로 변보해있었다.
     
    모든 곡을 작곡하고 1곡을 제외한 나머지를 작사한 신재진은 기타, 피아노, 하몬드 오르간과 드럼 프로그래밍을 담당하고 프로듀싱까지 소화하는 등 이번 데뷔 앨범에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내었다. 여전히 뾰족하고 어두운 가사말과 나른한 우울함과 권태, 그리고 슬픈 분위기로 가득하지만 밴드 시절과 달리 온건히 그의 목소리만 내는 이번 앨범은 더 부드러우면서 자조적이고 관조적이다. 그리고 그런 침전의 기운에 어쿠스틱한 포크 사운드는 더할 나위없이 잘 어울린다. 단촐하지만 희미하지 않은 올곧은 연주와 빈티지스러운 분위기를 잡아내는 피쳐링 악기들의 효율적인 편성은 좋은 멜로디와 은유가 반짝반짝 빛나는 솔직담백한 감성의 가사와 어우러지며 근래 보기 드문 서정의 미학을 펼쳐보인다. 거기에 루시드 폴만큼이나 잘 부른다고 말할 수 없는 맥아리 하나 없는 여리디 여린 그의 보이스 톤은 투박하지만 진정성이 느껴지는 호소력으로 작용, 잔인하리만치 매끄러운 가슴에 거세게 사포질한다. 마치 세상의 상처는 다 그렇게 혼자 끌어앉아 끙끙 앓고 고민해야 된다는 것처럼 서서히 속으로 가라앉는 그의 노래들은 처연하니 아프지만 그렇기에 비장하니 아름답다.

    첫 시작을 알리는 '거짓말'은 베이스를 제외한 모든 악기를 연주하고 담당한 신재진의 솜씨를 유감없이 느낄 수 있는 곡으로, 단촐하지만 저력있는 사운드메이킹이 주효한 모던락이다. 시니컬하면서도 자조적인 가사가 발랄한 분위기에 언발란스하게 얹혀진 반어적인 색채감이 두드러진다. 그 뒤를 잇는 'buterfly'는 서정적인 피아노 사운드가 인상적인 포크락으로 가녀리게 떨리는 그의 풋풋한 보컬이 버터플라이의 아련한 몸짓을 잘 표현해낸 노래다. 후반으로 가며 두터워지는 기타와 잔잔히 깔리는 쉐이커가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역시나 서정적인 매력과 침전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imagine love'는 수정선의 진가를 확인시켜주는 곡. 이전 신재진 EP에도 실렸던 곡이라는데 아쉽게 원곡을 듣지못해 어떤 방향으로 바뀌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러나 지쳐가는 느낌의 가사와 달리 기타와 피아노가 매만져주는 부드러운 심성은 한줄기 희망을 품는 듯해 위안 받는 기분이다. 경쾌하면서도 씁쓸한 기운이 가득한 스타카토의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마이너 코드의 '부탁'은 유일하게 가수 소히가 가사를 쓴 모던락으로 깔끔한 편곡과 시각적인 심상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복고적인 한국 6-70년대 세시봉 포크송을 떠올리게 만드는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은 일렁이는 기타와 살짝 이펙트 걸린 보이스가 쓸쓸하게 느껴지는 노래다. 말장난스러운 가사의 유희가 진심을 담아낸, 철학적인 자아성찰의 기회이기도 하다.
     
    예전 80년대 김광석과 동물원의 잔잔한 포크 사운드를 연상케 하는 'far away'는 피아노와 하모니카 그리고 하몬드 올갠이 빈티지스런 보코더의 보컬과 만나 추억 돋게 만드는 아름다운 곡이다. 과거 어쿠스틱의 매력은 바로 이런거야 라는 걸 새삼스레 입증이라도 하듯 수정선이 시도한 이 복고지향적인 사운드는 난해하지만 의미심장한 상징으로 가득한 가사와 만나 복잡미묘한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이 뒤를 잇는 '엄마야 누나야'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킬러 트랙. 김소월의 시에 안성현이 작곡한 동요로 유명한 이 동명의 노래를 기타 한 대로 수정선만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포크 사운드가 정말 일품이다. '강변'이 아닌 '강남'살자고 노래하는 세태를 담아낸 감각이나 잔잔하지만 귀에 아로새겨지는 천부적인 멜로디는 물론, 살짝 갈라지듯 잠기듯 부르는 허스키한 보이스가 어우러져 호소력있게 다가온다. 도시 이곳 저곳의 엠비언스가 깔리며 시작하는 '지어낸 슬픔'은 2분 남짓의 짧은 기타 연주곡. 혼탁한 세상 속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기타 소리가 한 방울의 눈물을 떨구며 응어리진 마음과 상처를 치유시켜주는 듯 하다. 에코로 울려퍼지는 피아노 소리, 이펙트 먹인 보이스가 몽환적으로 울려퍼지는 '작은 전쟁'은 단조롭지만 미니멀한 구조 속에서 치유와 상처에 대해 조금조근 이야기한다. 다소 지루하지만  가사의 날카로움이 이를 커버해준다. 마지막 곡이자 앨범 제목이기도 한 '화해'는 수정선 사운드의 집약체이자 본보기로 세월이 지나 생겨난 화해와 반성, 추억의 복잡미묘한 감성들을 잔잔하니 복고지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나 트럼펫 솔로가 간주에서 들려주는 세월의 무상한 간극은 낭만적이고 감성적이다.

    수정으로 만든 배는 아름답지만 너무 무거워 물에 뜨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가라앉은 배는 영원히 그 깊은 물 속에서 추억과 아름다움을 반추하며 두고두고 다시 발견될 날을 꿈꾸고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누구나 다 마음 속에 그러한 수정선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어둡고 우울하며 쓸쓸하고 슬픈 마음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를 건져올리면 반짝반짝 빛나고 아름답게 보일지 모른다. 신재진이 수정선에 담아둔 음악이 바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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