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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돌의 '판을 엎어라'
    책|만화|음악 2012. 2. 7. 22:51

    가로 세로 19줄씩 모두 361점으로 이루어진 나무판 위에서 검은 돌과 흰 돌로 서로 번갈아 두며 집을 많이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바둑은 서양의 체스와 함께 그 안에 담긴 오묘한 지략과 드라마틱한 흥망성쇠로 인해 마치 인생 여정에 비유되며 인격수양과 심신안정에도 도움이 되는, 지상 최고의 게임이자 지적인 스포츠다. 국내에도 이미 500만명이 넘는 아마츄어 동호인과 200명이 넘는 프로 기사를 두고 있는데, 높은 인기와 폭넓은 저변 그리고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다는 편견 또한 짙은 편이다. 일본에선 어린 바둑기사가 명인의 도움을 받아 활약하는 [히카루의 바둑(고스트바둑왕)]이란 만화로 어린 팬덤이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했다고 하는데, 정작 실제로 이런 어린 천재기사들 즐비했던(9살에 입단한 조훈현을 비롯해, 11살의 이창호, 12살의 조혜연, 최철한, 이세돌 등) 한국에선 학업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방편이자 머리가 좋아진다는 두뇌개발용으로 바둑을 접근하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였을까. 아직 젊은 나이지만 현재 한국 바둑랭킹 1위이자 그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이세돌 9단의 자서전 [판을 엎어라]가 나왔단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은둔 고수 유창혁과 절대 흔들리지 않는 마성의 포커페이스이자 돌부처 이창호에게 당시 당랑거철 螳螂拒轍이라 할만큼 무모하게도 파상공격을 펼쳐내며 그들을 꺾고 일약 스타로 떠오른 신성 이세돌의 좌충우돌 거침없는 인생담이라면 만화 못지 않은 재미와 흥미를 던져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32연승 신화에, 도합 800승을 넘기고,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거머쥔 이 당찬 명인의 소신있는 행보와 야생마같은 파격적인 발언들을 조금조근 진솔하게 담아낸 이 고백은 한국 바둑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되리라 생각한다. 다소 건조하니 투박한 문체와 조금은 두서없이 반복되어지는 내용이 아쉽기는 하지만, 솔직담백하게 자신의 바둑 인생사와 그간 대회에서 만났던 라이벌들에 대한 소회, 현재 바둑계에 대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발언들은 그간 궁금하게 느껴지던 흑백 세계관에 대한 참신한 초대장이라 봐도 아깝지 않다.

    책은 서두를 여는 간단한 프롤로그와 마무리 짓는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총 5장으로 구성되어있다. 각 장마다 포석, 운석, 행마, 수상전, 끝내기와 같은 의미심장한 바둑 용어를 붙여 어떤 내용을 담고있는지 유추하게 만드는 센스가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바둑에서 중반전이나 집 차지에 유리하도록 초반에 돌을 벌여놓는 걸 의미하는 '포석'을 제목으로 붙인 1부에서는 이세돌 자신이 바둑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유년기 시절 그리고 가족사를 담담히 술회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바둑을 두기 시작해 드라마틱한 삶의 기복이나 기구한 인생 역정은 없지만, 질풍노도의 예민하던 시기 남들과 달리 사회에 뛰어들었던지라 마음을 다 잡지 못한 회한이나 그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언뜻언뜻 묻어난다. 바둑을 두어나감을 의미하는 '운석'을 부제로 달은 2부는 본격적인 이세돌 바둑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의 공격적이고 강한 바둑 스타일이나 중국 리그에 진출하게 된 변辯, 마인드 콘트롤과 자기 관리에 대한 중요성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세돌 바둑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챕터로 그의 당차고 확고한 사상과 승부사적인 기질, 뚝심을 엿볼 수 있다.

    세력을 펼쳐 돌을 놓는다는 의미의 '행마'의 3부는 바둑에 대한 이세돌의 생각들이 담겨있는 장으로 95년부터 프로기전에 뛰어든 18년차 프로기사로서 바라본 현 바둑계의 담론과 시류, 관심사 등을 다루고 있다. 좋은 바둑에 대한 고민과 적은 수의 여성 기사에 대한 아쉬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신수(神手)의 1회성 전락, 천재의 스포츠로서의 바둑과 내 길이 아니면 포기하라는 선택과 집중에 관한 인생 메세지까지 다양한 의견들을 만날 수 있다. 단독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고립된 돌끼리 사활을 걸고 싸움을 벌리게 된 상황을 의미하는 4부 '수상전'에 이르러선 쉽게 털어놓지 못할 개인적이고 은밀한 지점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고백한다. 스타크래프트와 부루마블, 집바둑을 즐기는 동료 뒷담화(?)부터 자신의 결혼 이야기, 유일한 취미인 등산과 경제적인 관념까지 미묘한 에피소드들이 짧게 그리고 유머스럽게 자리한다. 바둑에서 끝마감으로 바둑점을 놓는 것을 의미하는 5부 '끝내기'에 이르러선 2009년 가장 센세이셔널했던 자신의 휴직과 복직을 앞둔 심정에 대해 털어놓는다. 괴로웠을 법한 이슈를 무덤덤히 속시원하게 털어버리는 그의 고백과 당찬 포부를 읽고 있으려니 젊은 신세대 프로기사로만 보이던 그의 이미지가 조금은 다르게 비친다.

    아직은 젊고, 또 계속 진행 중인 발걸음인지라 그의 자서전을 읽다는 게 조금은 서먹하고도 낯간지럽게도 느껴지지만, 이만큼 세계적인 캐리어와 화려한 기록을 쌓아올린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그의 노력과 열정에 탄복하는 마음 또한 강하다. 그러기에 그의 무한한 도전과 승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꼭 10번기를 보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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