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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익의 '싱크홀'
    책|만화|음악 2012. 1. 15. 21:07

    1970년대 헐리우드는 재난의 세계였다. 공항은 폭설로 뒤덮여 비행기들이 연착했고, 거대한 선박은 빙하와 부딪치며 차거운 바다로 좌초되었으며, 천사의 도시 로스엔젤레스는 거대한 지친이 덮쳐 마을과 건물이 파괴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현대의 바벨탑을 상징하는 안정성 제일의 글래스 타워는 과도한 전압을 이기지 못한 불량 부품으로 인해 대화재가 발생했으며, 마을엔 살인 벌떼의 습격으로 군부대가 출동하는 한편, 하늘에선 거대한 행성이 궤도를 바꿔 지구와 충돌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틈틈히 비행기는 납치되고 불시작하며 승객들의 목숨을 위협했고, 뒤집어진 배에선 귀중품을 노리는 도적단까지 출몰해 아전투구의 싸움과 배신까지 발생했다. 비록 특수효과는 미천하고 허술했지만 시대 상황의 폐해를 상징하고,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버둥거리는 스타들의 휴머니즘 가득한 생존기를 보며 관객들은 열광했고 눈물 짓기도 하다 결국 엔딩에 이르러선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이후 한층 업그레이드된 시각효과와 예산으로 중무장한 트위스터와 볼케이노, 딥 임팩트에 코어와 2012 같은 작품들이 줄줄이 쏟아지며 재난물은 시대의 상징과 스타들의 고군분투 생존담을 떠나 일종의 가상 체험장으로 변질됐다.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이 있다면 '내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야'라는 안도감일까.
     
    [질주질주질주]로 젊은 나이에 데뷔해 모 방송국 PD로 재직하며 [서울대 야구부의 영광], [카시오페아 공주], [심야버스괴담], [압구정 소년들] 등 다양한 소설을 퍼낸 바 있는 이재익의 새 소설 [싱크홀] 역시 소재만 조금 특이한 상황을 취하고 있을 뿐, 그런 1970년대 헐리우드 재난물의 문법을 제법 충실히 따르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혁의 트라우마 및 상처를 담아내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등정의 프롤로그를 비롯해, '그랜드호텔'식으로 여러 인물군상의 사연과 상황을 다중 플롯으로 담아내는 전반부는 후반에 대재난이 닥쳤을 때 극적인 상황을 고조시키기 위한 착실한 발판이 되고, 관객이나 독자가 그 이야기에 빠르게 동참할 수 있게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활용된다. 다만 아쉬운 건 시절이 하수상한 현재 여러 사회문제 및 정치적인 요소를 담아 일종의 재난으로 상징할 수도 있었을텐데, 일반 한국 주말드라마에서 몇 번이나 봤을 법한 상투적인 재벌남과 꽃집녀의 사랑 타령과 악독한 재계회장의 야욕과 독단에 의지한 채 풀어냈다는 것이다. 그 외 인물들 역시 정형성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작위적인 설정들로 가득하다. 이런 재난 앞에 언제나 반칙처럼 등장하는 카오스적인 악당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이며, 주인공의 영웅적인 품새 또한 분명 여러모로 고민이 필요한 요소들이 있었을텐데, 이를 그저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휙- 그려냈을 뿐 깊이와 담론까지 건드리진 못한다.

    후반부 하늘의 노여움처럼 들이닥치는 '싱크홀'의 대재난 역시 기대했던 위력이나 공포감, 혼돈을 담아내기에 2% 부족하다. 영화라면 실감나는 비주얼로 생생히 그려낼법한 그 인간의 무력감을 그의 문체로선 영 감내하지 못한다. 오히려 글이기에 더 크고 무섭고 잔인한 자연의 공포를 연상케하며 신 앞에 왜소해져만 가는 인간의 나약함이 극적으로 대비되어야 할텐데 이 소설은 그 심도까지 도달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잔혹하게 행동하던 주현태의 움직임이 생뚱맞을 정도로 두드러져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유로 돔 안에 갇혔던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이지만, 적어도 그 작품에선 끊임없이 생성되던 원초적인 공포와 사회를 축소해놓은 인간관계, 본능과 믿음이 교차되는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의 움직임이 너무도 사실적이라 몸서리가 쳐졌었다. 엔터테인먼트기 때문에 얄팍해도 괜찮다는 건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싱크홀]은 재난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드라마에 대해선 잘 캐치하고 있지만 과연 이를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재해석했는지 일견 의문이 든다. 꼼꼼하게 진행되던 전반에 비해 다소 성기던 후반의 진행도, 묘사도 아쉬움을 더한다. 그럼에도 일단 한국 소설에선 보기 드문 재난물을 소재로 이만큼의 강도와 이슈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는 시도와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간 이재익 소설의 가장 주목할만한 점이라면 장르와 소재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이 소재주의로의 함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대재앙 앞에 맞서는 여러 군상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플롯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새로운 건 두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이 언제고 배신하고 푹 꺼진 채 밑도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싱크홀'의 공포다. 그건 '삶이란 (언제 어디서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고난의 연속'이라는 표현과 맞닿아있는 것이기에 이 소설이 그런 심층적인 내면의 공포와 좀 더 연결되길 기대했다. 사실 현재, 실업공포와 살인물가, 병맛정치에 학원폭력이 범벅이 된 이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모두가 재난영화 속 주인공들이 아닌가. 한낱 소설에 정색하고 아쉬워하는 내 비겁함이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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