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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광열의 '유럽, 작은 마을 여행기'
    책|만화|음악 2012. 2. 26. 17:04

    마음이 울적하고 지칠 때, 혹은 결딜 수 없이 무료한 일상의 무게에 숨이 막힐 때, 집을 나서 아무 버스에 올라탄다. 지하철도 괜찮다. 될 수 있으면 듣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번호나 익숙하지 않은 노선 색깔을 추천한다. 그렇게 내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 전혀 가보지 않았던 지명의 역 앞에서 내려 마음이 가는 출구로 나가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평범한 주택가일 수도, 시끄러운 공장 주변일 수도 있고, 학생들과 주점으로 가득찬 대학가일 때도, 외국인 노동자와 취한 자들이 휘청대는 우범지대일 때도 있다. 더울 땐 아이스크림 하나 손에 쥐고, 추울 땐 붕어빵에 호떡, 혹은 포장마자에서 따라주던 종이컵의 오뎅 국물을 추천한다. 그렇게 돌다 힘들면 옛날 목욕탕에 들러 한가한 오후의 때를 벗겨내도 되고, 낡은 오락실에 들어가 유행 지난 격투 게임을 하며 상념을 날려보내도 되며, 놀이터 그네에 앉아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쉬어도 좋다. 짦은 여정을 통해 갑갑했던 분위기를 벗어던지고 활력을 얻는다.

    작은 여행은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피폐한 정신을 구원한다. 거창한 목표나 심도있는 테마 따윈 잠시 치워두자. 여기 갔다 왔소 인증샷과 판에 박힌 포즈도 구차하고 지겹다. 여정 그 본연의 모습에 몸을 맡긴 채 새로운 환경과 사람에 주목해본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 화려한 자연 경관과 삐까뻔쩍한 문화재와 사찰, 성당도 멋지지만 그 중간 중간 머무르게 되는 사람 사는 동네에 눈을 돌려본다. 제일 즐거운 건 사람 사는 동네들, 그 도시 어딘가를 걷고, 먹고, 자기 직전의 찰라다. 그들의 생활에 잠시 끼어들어 부대끼며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구나 라는 인식에 위로받고 편안해진다. 동남아나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또 어딘가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 사는 동네의 작은 여정은 대체로 즐겁고 재미있는 법이다. 베테랑 여행가이자 의사인 지은이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와 스위스를 택했다. 파리나 리용, 취히리나 바젤 같은 대도시를 지양하고 사람들이 잘 경험해보지 못한 작은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감상은 이렇게 책으로 묶여졌다.

    [유럽, 작은 마을 여행기]에는 모두 22개의 마을이 담겨져 있다. 프랑스 11개, 스위스 11개.  마르세유이나 아비용, 프로방스, 루체른과 로카르노, 생 모리츠처럼 얼핏 세계사 시간이나 미술사, 올림픽 등과 연관돼 들어본 곳도 있지만, 카르카손, 카마르그, 모뇨, 이솔라 벨라, 베르차스키처럼 생소한 곳이 더 많다. 그 작은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소박하지만 정성스레 찍힌 사진들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여행했던 발자취들을 진솔하고도 감상적으로 담아냈다. 그 지역의 축제나 기념관, 특산품과 문화 및 먹거리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소개하는 정보나 지식들도 알차고 재미나다. 다리의 미술관이라 불리우는 루체른의 카펠교, 얇디 얇은 돌들을 층층히 쌓아올려 인상적인 장관을 보여주는 고르드의 보리 마을, 중세의 성들이 압도적인 장관을 보여주는 카르카손, 로마의 유적이 남아있는 풍뒤가르의 압도적인 정경, 산과 호수가 마치 그림 엽서 같은 풍광을 전달하는 간드리아, 배 모양의 섬이 인상적인 이솔라 벨라 등 그 하나하나 마을에 대한 인상적인 코멘트와 여정도 흥미로웠다.

    다만 조금 아쉬운 건 중간 중간 드러나는 종교적인 색채의 언급이다. 유럽이라는 지역 특성상 기독교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고 해도 감상적인 부분에서까지 굳이 보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마음이 살짝 들었다. 조금 더 건조하고 객관적인 시각이었다면 그 여정에 쉽게 빠져들었을 것 같다. 또 지도나 일정에 대한 간략한 정리들이 첨부되었다면 어땠을까. 들어본 지명보다 생소한 지역에 대한 소개가 많은 만큼 어떤 경로로 어떻게 이동하고, 그 마을이 프랑스나 스위스의 어느 지역 쯤에 위치해 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다면 어행기로서의 묘미가 배가되었을 것 같다. 감상으로서 여행기 외에 실용적인 측면에서의 여행서로도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사진에 비해 단 하나의 코멘트도 안 달려있다는 것도 좀 아쉽다. 글을 읽으며 여기가 어딘지 충분히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이런 조그마한 배려가 더 깊은 감흥과 몰입을 자아내기에 편집상 디테일에 신경 썼더라면 더 좋은 여행기가 되었을 듯 싶다. 그럼에도 올컬러 사진들의 운치의 향찬은 보기만 해도 설레이고 가슴 뛰게 만든다. 막 여행을 시작한 것처럼.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작은 동네 여행을 떠나듯 세계로 훌쩍 떠나고 싶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대신 이 여행기를 펼쳐든다. 글과 사진에 담긴 설레임과 낭만을 음미하며 소박한 유럽의 풍광 속으로 풍덩 빠져본다. 지하철과 버스로 떠나는 작은 여정 중에 이 책을 읽는다면 더 큰 대리만족을 얻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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