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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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도서실의 바다'책|만화|음악 2008. 4. 15. 23:40
온다 리쿠는 추억 속에서 떠돈다. 그것이 아름답건 추악하건 슬프건 기쁘건 그녀의 글 속엔 언제나 기억이라는 화두가 아스라히 손대면 부셔질 듯한 이미지와 결합해 사람들이 걸어 온 생의 흔적을 비춘다. 잊어버리고 지워버리며 각색된 기억을 통해 현재를 무덤덤하니 살아가는 현대인을,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조작된 삶을 냉랭하고 무의식적으로 평가내리는 현대인의 습관을 고스란히 글에 담아 포장하는 그녀의 솜씨는 여전히 탁월하고 꼼꼼하다. 장편처럼 강렬하고 화려한 맛은 없지만 언제나 조용한 듯 새침한 듯 불안한 정갈함을 보여주는 단편들이 담겨있다. 긴 호흡의 키스보다 짧은 찰라의 뽀뽀가 더 인상적일 수 있듯, 그녀의 단편은 기습적이고도 찰라적인 순간의 인생의 여러 모습들을 캐치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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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스텝 파더 스텝'책|만화|음악 2008. 3. 31. 05:46
무겁고 답답할 수 있는 사회문제들을 이렇게 가벼운 터치로 그릴 수 있는 것도 그녀이기 때문에 가능한건지 모르겠다. 절도, 납치, 유괴와 강간, 우발적 살인 등 온갖 비리와 병폐들이 쏟아지지만 영악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쌍둥이 형제와 얼떨결에 그들의 계부가 된 도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7개의 연작 단편엔 경쾌한 미소까지 지어진다. 알고보면 참 끔찍한 세상인데, 한발짝만 물러서면 그 부조리들이 실없게 느껴지는 건 이 세상이 조소로 가득찬 아이러니 덩어리기 때문이 아닐까. 폐부를 찌르는 사악한 독기가 허파를 찔러 웃게 만드는 것이 아닌, 그저 멍청하고 잘난 인간들이 잰 체 하려는 데서 오는 불쌍한 자존심이 채플린 코미디를 보듯 나열돼 웃게 만드는, 기분 좋은 씁쓸함이다. 뭘 써도 현대 사회 전반을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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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봄철 딸기 타르트 사건'책|만화|음악 2008. 2. 19. 22:28
라이트 노벨에 대한 특별한 거부감은 없지만, 라이트 노벨이란 말 자체는 싫다. 소설의 경중이 뭐가 중요하냐 싶어서. 소설이면 다 같은 소설이지 라이트급, 미들급, 헤비급 같은 체급 구분이 필요한가 우습기도 하고. 사실 괜한 트집이요, 딴지다. 그냥 꿀꿀한 기분과 스트레스로 가벼운 작품이 보고 싶긴 해서 골라 집었다. 그럴 땐 상당히 도움이 되더만. 빨리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달짝지근한 제목만큼이나 안전한 추리소설이다. 살인이나 유괴, 폭력이 나오지 않으니까. 어찌보면 일상의 평범하고 작은 사건들의 연속이다. 때론 밍밍하기도 하고, 소소하기도 한... 범인을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트릭이 궁금하긴 하지만 딱히 알려고 들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고만고만한 사건이 5 편 연작으로 묶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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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펭귄뉴스'책|만화|음악 2008. 2. 13. 17:57
글로 쌓인 스트레스는 글로 푼다. 장르 불문하고 다른 글들 읽다보면 시샘과 부러움이 동시에 솟구쳐 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 내던진 키보드를 다시 앞에다 끌어놓고 나도 어떻게 하면 저런 명문을 따라해 볼 수 있을까 짱구를 굴리게 된다. 물론 '결국 안 된다'에 좌절하며 뻗어버리곤 하지만. 그래도 몇분간(?)의 의욕고취라도 필요하니까 자꾸 읽는다. 가급적 단편으로. 그래서 골라잡은 게 김중혁의 첫 단편집이었다. 제목이 끌렸다. 펭귄뉴스라니. 단 걸 보면 입 안에 고이는 침만큼이나 제목에서부터 상상력에 침이 고이잖아. 얼어붙은 전두엽을 확확 돌려줄 거 같고. 그 기대감만큼 일상 속에서 포착한 섬세한 일탈이 세련되게 표현된 소설들이었다. 웰즈의 단편을 보는 듯한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와 '바나나 주식회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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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의 '코로나도'책|만화|음악 2008. 1. 4. 21:17
인간에 대한 묵직하면서도 어두운 포스를 무럭무럭 안겨주는 데니스 루헤인의 글발은 새벽 3시 심야 라디오 DJ의 나지막한 목소리 같다. 이내 맞이할 밝은 아침을 이야기하지만 지금은 어둠이라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하면서도 강직한 울림을 갖기 때문이다. 우울하면서도 쌉씨한 인물군상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는 결코 유쾌한 작가가 못된다. 그렇다고 속사포처럼 쏴대는 랩처럼 독한 맛을 지니고 있지도 않고. 그저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지하철역 길바닥 어딘가에 조용히 앉아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면 추적 60분 속의 아이템마냥 어마어마한 이슈 보따리를 풀어내는 도시 빈민층의 제보자 같단 생각뿐이다. 그가 말하지 않으면 결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진실을 가진. 이 단편집은 그러한 심증을 더욱 굳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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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노 나쓰오의 '암보스 문도스'책|만화|음악 2007. 12. 13. 23:35
엄밀히 말하자면 이 단편집은 추리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 비밀, 섹스, 음모, 배신, 추억, 소외, 사랑과 공포를 다루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지극히 냉정하고 노멀하기 때문에. 소설 어디에도 스릴과 트릭을 느낄 수 없다. 대신 어떠한 범주로도 정의할 수 없는 기리노 나쓰오만의 다크 월드가 존재할 뿐이다. 비등점에 다다른 뜨거운 소재들을 이처럼 차갑고 비정하게 내뱉는 그녀의 문체는 매혹적이다. 거부감이 들 정도로 톡 쏘는 와사비 맛과 같다. 그녀만의 강렬하고 일탈적인 여성 캐릭터는 여전하고, 일반적인 모럴을 손쉽게 뒤집는 인간의 탐욕과 시기로 점철된 세상 역시 그대로다. 부정적이고 삐딱한 세계 속에 살아 숨쉬는 군상들은 치졸하고 더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를 묘사하는 그녀의 시선은 지극히 담담하고, 가라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