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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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책|만화|음악 2011. 2. 15. 03:59
13편의 독특한 질감을 가진 듀나의 새 단편집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SF로 치부하기엔 스펙트럼이 너무 넓고, 환상 소설로 보기엔 지극히 냉소적이고 까칠하다. 그렇다고 호러로 묶기엔 얌전하고, 멜로로 받아들이기엔 끔찍하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그 장르의 경계에 선 듀나만의 얼터너티브한 글쓰기는 여전하다는 거고, 장르를 비틀며 재조합하며 현실의 트렌드를 오마쥬하는 동시에 조롱하는 농락의 솜씨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물론 취향을 타겠지만 이 지극히 불유쾌한 심보의 도도한 매력은 장르물에 대한 저변이 그리 넓지 않은 시절에 나왔던 [면세구역]이나 [태평양 횡단 특급] 때부터 기인하던 특징이기에 매우 반갑다. 뮬론 중단편을 묶은 [대리전]이나 [용의 이]도 그간 출간되었지만, 건조하고 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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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구적초'책|만화|음악 2010. 7. 31. 04:44
능력은 굴레다. 운명이고 미래다. 능동적이면 정의되고, 피동적이면 해석된다. 모두 원하지만, 모두 다 가진 건 아니다. 쓰면 쓸수록 발전하고 엔트로피에 비춰 한계도 보인다. 그들은 계급이다. 훈장이고 결과다. 물론 그게 희생과 댓가의 다른 말이긴 하지만, 책임이란 이상한 논리로 합리화시키고 자부해 나간다. 그러길 꿈꾼다. 시기하고 동경하며 바란다. 허나 저주인 동시에 노예다. 능력자는. 미미 여사의 초능력에 대한 사랑은 남다른 듯. 짧은 단편 세개를 모아 그럴듯한 능력자들의 파일럿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이중 장편화된 이야기도 있지만, 대체로 소품이고 미스테리의 변죽을 올리는 데 기능적인 역할만 해댄다. 그러나 이를 지닌 사람에 대한 본질을 꿰뚫는 시선과 비릿한 사회에 대한 후각 만큼은 여전히 생생하고 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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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절규성 살인사건'책|만화|음악 2010. 2. 18. 18:49
독특한 외형의 집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설정만 놓고 보면 당연히 관(館) 시리즈의 아야츠지 유키토를 떠올릴 법한데, 이 성(城) 시리즈 단편집의 작가는 재밌게도 아리스가와 아리스다. 신본격의 쌍두라 불리는 그들이지만 비슷한 데뷔 시기에, 비슷한 환경에서 경력을 시작했다는 것말곤 전혀 다른 취향과 스타일을 갖고 있는데, 아리스가와가 철저한 논리와 인간 중심의 페어플레이를 강조하는 엘러리 퀸형 퍼즐 미스터리를 선보인다면, 아야츠지는 기괴한 분위기와 트릭, 뒤통수 때리는 반전과 음산한 뒷맛에 집착하는 존 딕슨 카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아야츠지 유키토의 셋팅으로 시작하지만, 전혀 다른 아기자기하고 정공법적인 추리를 선사하는 [절규성 살인사건]은 아리스가와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나는 내식으로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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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 컬렉션-중'책|만화|음악 2010. 2. 1. 15:30
여기 미야베 미유키가 뽑아낸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들은 추리소설의 범주를 넘어 본격 문학에 가까운 질감을 선사한다. 범죄 자체에 대한 외향적인 흥미보단 범죄가 발생하게 된 내면적인 동기와 인간에 대해 더 큰 관심을 보이기에 그의 글에는 언제나 현실의 피로함이 담겨있다. 그는 인간 내면의 비틀어진 마음과 추악하고 비겁한 탐욕 그리고 사회화 속에서 탄생되어지는 컴플렉스에 대해 뛰어난 성찰을 보인다. 어떠한 감정과 시선도 담지 않은 채 냉랭하게 인물을 쫓아가는 그의 메마르고 건조한 필체는 까끌한 시멘트 벽과 같은 사회의 본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하다. 묵직한 두께만큼이나 묵직한 감성을 던져주는 세이초의 무게감이 본 단편집의 묘미다. 여자와 남자로 구분지어 그의 본격적인 면모를 소개하는 중편이야말로 본 컬렉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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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히데오의 '그늘의 계절'책|만화|음악 2008. 12. 2. 00:29
경찰이 나오고 미스터리를 담고 있지만, 본격물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파 추리소설에 가까운 접근법으로 범인이 아닌 경찰 조직에 메스를 들이밀고 있는 이 단편집은 오히려 엄밀리 따져 코지 미스터리 범주에 해당한다. 그러나 밝고 경쾌한 일상이 아닌 피곤하고 눈치 봐야 되는 조직사회의 찌든 현실이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퍼즐이나 트릭보다 더 복잡하고 답이 없는 인간 관계에 주력한다. 악당을 쳐부수고 검거하는 정의의 편의 경찰 모습이 아닌, 똑같이 월급 받아가며 일을 처리하고 승진에 고민하는 생활인으로서의 리얼한 경찰 모습을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그늘의 계절]은 웃음기가 빠진 [춤추는 대수사선]에 가깝다. [종신검시관]처럼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캐릭터가 여전히 꿈틀대는.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어디 속시원히 터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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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카 슈케이 外의 '적색의 수수께끼'책|만화|음악 2008. 11. 20. 23:13
어떤 의도로 색깔별로 나눴는진 모르겠지만, 에도가와 란포상 5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단편집 4권 중 하나. 모두 5개의 (중편에 가까운) 단편이 실려있다. 작가들 면면 또한 화려한데, 신포 유이치나 다카노 가즈아키의 경우 그 기대치에 걸맞게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와 현재를 교묘하게 엮는 산악 (미스테리라고 보긴 좀 그렇고) 심리드라마 '구로베의 큰 곰'과 짧지만 공포 스릴러 영화 만큼이나 강렬한 뒷맛을 선사하는 '두 개의 총구'는 이 단편집의 백미. 정통 밀실을 다룬 '밀실을 만들어 드립니다'와 딸의 찾는 이야기인 '라이프 서포트', 흥미를 자아내는 시작이 정말 좋았던 '가로'는 다소 2% 아쉬운 듯. 남은 청색과 백색, 흑색의 수수께끼도 찾아 읽어봐야겠다. 격하게 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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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히데오의 '종신검시관'책|만화|음악 2008. 7. 14. 23:33
검시관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무시무시함(?)과 달리 8개의 연작 미스테리가 담긴 이 단편집의 묘미는 잔혹이라던가 퍼즐이라기 보단 감동이다. 논리적이고 명석한 트릭과 반전으로 무장돼 뒤통수를 때리는 치밀한 설계의 미학이 아닌 한박자 헐렁하고 의외성 높은 인간의 심리와 감정을 앞세워 독자를 사로잡는다고 할까. 그 중심에는 8편 모두 직간접적으로 등장해 사건을 파헤치는 '구라이시'라는 종신검시관 캐릭터가 한몫한다. 시니컬하면서도 인간적인 구라이시는 때론 명탐정의 모습으로, 때론 현자의 모습으로 여기저기 사건에 참견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던 사건의 진실을 바로잡게 만든다. 그 내면에 깔린 세상사의 기저가 감동과 울림을 선사하는 것. 사건을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얽히고 섥힌 오해와 증오, 사랑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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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기담집'책|만화|음악 2008. 5. 6. 23:58
제목에서 오는 으스스한 포스와는 달리 전형적인 하루키 단편집이다. 다만 그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기묘한 뉘앙스를 풍긴다고 하나. 공포 괴기와는 거리가 멀고 마치 '기묘한 이야기'나 '환상특급'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무난하고 가벼운 얘기들이 몽환적으로 소개되는 느낌이다. 전혀 있을 법하지 않지만, 어디선가 들어볼 것만 같은 일상의 우연성을 마구마구 뒤섞어 비논리적이고 부조리한 삶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하루키의 필치는 담담하니 꾸밈이 없다. 인생은 그런 거라고. 정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문제가 중요한 거라고 말하는 듯 하다. 오랜만에 붙잡은 하루키의 글이 지겨운 일상에 식욕을 돋군다. 하루키는 좋은 에피타이저다. 일상 속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