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듀나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책|만화|음악 2011. 2. 15. 03:59

    13편의 독특한 질감을 가진 듀나의 새 단편집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SF로 치부하기엔 스펙트럼이 너무 넓고, 환상 소설로 보기엔 지극히 냉소적이고 까칠하다. 그렇다고 호러로 묶기엔 얌전하고, 멜로로 받아들이기엔 끔찍하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그 장르의 경계에 선 듀나만의 얼터너티브한 글쓰기는 여전하다는 거고, 장르를 비틀며 재조합하며 현실의 트렌드를 오마쥬하는 동시에 조롱하는 농락의 솜씨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물론 취향을 타겠지만 이 지극히 불유쾌한 심보의 도도한 매력은 장르물에 대한 저변이 그리 넓지 않은 시절에 나왔던 [면세구역]이나 [태평양 횡단 특급] 때부터 기인하던 특징이기에 매우 반갑다.
     
    뮬론 중단편을 묶은 [대리전]이나 [용의 이]도 그간 출간되었지만, 건조하고 삐딱한 특유의 듀나식 불친절한(?) 문체는 오히려 그런 긴 호흡보다 짧은 분량의 단편에서 더 빛을 발하지 않았나 싶다. 이 정도 분량에서 기상천외한 셋팅을 능구렁이처럼 시침 뚝 떼고 펼쳐보이면서도 서늘한 뒷맛을 안겨주는 이가 대한민국에 (정치인놈들을 제외하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얼핏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으로 비칠 만큼 이 암담하고 잡다한 인간들의 꼬인 행태와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존재의 의미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 극단성에 사뭇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다시 되살아날 만큼 휴머니즘스럽기도 하다.
     
    누구나 한번쯤은 떠올려봄직한 소품 '동전마술'과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로 상큼하게 시작해 멜로통속치정극의 탈을 쓴 유령 이야기 '메리 고 라운드'와 통신 사회를 기가 막히게 비틀며 소설적인 시점을 활용해 진짜 이야기로 탈바꿈되는 'A,B,C,D,E&F', 시스템에 대한 은유가 읽히는 '호텔'과 '죽음과 세금'을 거쳐 소녀 로봇 이야기 '소유권'을 지나면 표제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마주친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스타일을 차용해 현실과 장르를 혼용하고 재조합해내는 솜씨는 북한 빨갱이와 희망교회 외계선교단 버스가 나올 때 절정에 이른다. 조선 야화의 듀나식 컨버젼 '여우골'과 정통 SF추리물 형식의 '정원사'가 계속 이어지고, 자동인형에 대한 듀나식 동화 '성녀, 걷다' 후엔 본 단편집에서 가장 긴 분량의 대작 '안개 바다'가 소개된다. 그리고 역시나 듀나식 호접몽이자 이벤트 호라이즌인 '디북'으로 대단원을 막을 내린다.
     
    아름답다, 이 빌어먹을 세상. 책을 덮으며 제일 처음 들던 생각이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