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에서 여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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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남의 '깊은밤 갑자기'영화|애니|TV 2009. 7. 27. 23:56
또 한 편의 잘 만든 국내산 80년대 명품 호러 스릴러. 지금은 흔해 빠진 부부 간의 미묘한 관계를 다룬 이 영화는 그 당시 막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과감한 애로티시즘을 적극 활용해 대담한 성애씬과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촬영 테크닉으로 시선을 확 끌어당긴다. 멀게는 [레베카]와 [가스등]을, 가깝게는 [원초적 본능]을 연상시키는 플롯(윤삼육 각본)에, 독특하게 토테니즘(목각인형)과 샤머니즘(무당의 딸)을 결합시켜 줄곧 긴장감을 유지하는 연출력(고영남 연출)도 수준급이지만, 남성성이 강조된 남편 역에 윤일봉, 히스테리컬하면서도 섬세한 부인 역에 김영애, 백치미 한 가득한 글래머 이기선의 적역 캐스팅이야말로 이 영화를 극강으로 만들었다. 남편의 애매모한 행동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며 심리적으로 부인을 조여들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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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웅의 '두견새 우는 사연'영화|애니|TV 2009. 7. 24. 23:54
영화는 뻔하디 뻔한 고전 통속 멜로물을 취한다. 윗마을과 아랫마을, 양반댁과 천민의 동명이인(!)에서 오는 비극이랄까. 느리디 느린 호흡으로 사랑에 버림 받는 여인네의 기구한 신세 한탄이 구구절절 주부 대상 라디오 사연처럼 소개된다. 그러다 후반 10분. 갑작스레 인저리 타임에 역전골을 꽂아넣는 축구팀 마냥 호러와 판타지로 돌변하며 소복 귀신과 무당, 뮤지컬스런 극락 세계가 순식간에 펼쳐지는데, 어느새 끝날 시간! 그러다보니 복수와 용서, 화합이 충분히 녹아들기에는 당연히 무리다. 생뚱맞게 해피엔딩으로 서둘러 끝맺는 급박한 결말이 지금 보면 퍽 당혹스럽다. 김지미와 신성일이라는 두 청춘스타의 이름값에 기대 신파극을 제대로 펼쳐보이는 이 영화는 정통 호러라기 보단 TV 시리즈로 익숙한 '전설의 고향'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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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수의 '여곡성'영화|애니|TV 2009. 7. 21. 23:50
80년대 최고의 호러라 손꼽혀왔던 [여곡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낡고 구닥다리에 유치한 결과물이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약발이 남아 두근두근거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명불허전이랄까. 아직도 잔상이 흐려지지 않을 우리네 확실한 명품 호러다. 쓸데없는 깜짝쇼에 집착하기보단 한 양반 집안의 여성 수난사에 집중하며 거두절미 이야기를 심플하게 풀어낸다. 한정된 인물들이지만 각자의 사연이 녹아들며 저주와 원혼의 잔혹사가 80년대 특유의 촌스럽지만 은근 묘한 매력이 있는 애로틱한 시선과 함께 어우러져 쌉쌀한 재미를 안겨준다. 옵티컬과 주밍을 이용한 효과들은 전체적으로 싼티아나 급이라지만, 시어머니로 등장해 무시무시한 포스를 작렬하는 석인수 씨의 카리스마 만빵 넘치는 연기는 크리스토퍼 리나 벨라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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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민의 '살인마'영화|애니|TV 2009. 7. 20. 23:43
김기영과 이만희만 있는 게 아니다. 이용민도 있다. [살인마]는 진정 60년대 가장 빛나는 한국 호러/스릴러 중에 한 편일 것이다. 와이드한 화면에 담아낸 공간 연출력과 과감한 동선, 흑백의 음영을 이용한 표현주의적인 디테일에, 거리낌없는 다양한 시각효과까지. 전통적인 방식의 한국 괴담류 스토리를 굉장히 다이나믹하면서도 이질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다. 짜임새 넘치는 구조 또한 참신하고. 호기심을 유발해 끝까지 끌고 가면서 클라이막스를 놓치지 않는 대담한 연출력은 할리우드 뺨친다. 초반 짧은 미술관 씬은 [드레스드 투 킬]을 연상시켰고, 흘러내리는 초상화나 들판에서 귀신들 춤추는 장면을 삽입한 시도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만큼이나 초현실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게다가 여성들에게 무능력하게 휘둘리는 '악역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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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교의 '마계의 딸'영화|애니|TV 2009. 7. 19. 03:22
80년대 한국 호러는 뒤로 갔다. 그것도 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선 아예 자취를 감췄고. 온갖 장르 영화들이 꽃을 피우던 60년대 독자적인 색채와 미학으로 중무장한 호러는 서슬 퍼런 독재 정부와 TV의 대공세 앞에 길을 잃었다. 김기영이란 걸출한 감독마저 없었다면 퍽이나 암울한 70년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 시기 [며느리의 한], [옥녀의 한], [꼬마신랑의 한], [낭자 한] 등 이른바 '한(恨)' 시리즈를 내며 꾸준히 공포영화를 만든 박윤교 감독. 그 장르에 대한 집착과 노력만큼은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마계의 딸]은 그 80년대 뒤로 간 한국 호러의 좋은 예일뿐, 지나친 동어 반복과 획일적인 모양새로 참신함과 호러의 매력을 잃은 작품이다. 컨벤션한 유치찬란 조명이나 조악한 전자음향, 아크로바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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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순의 '대지옥'영화|애니|TV 2009. 7. 17. 02:01
무시무시한 포스를 내뿜는 제목과 달리 무섭지 않다. 지금 보면 엉성하기 짝이 없는 조잡한 효과와 영화의 90% 가량을 어설픈 세트로 커버한 기술적 완성도가 더욱 더 그렇게 만든다. 게다가 불교 법전을 고스란히 답습한 교훈극이라니, [헬레이저]급의 지옥도와 성모럴를 상상했던 내가 너무 앞서 간 듯 싶다. 이건 벳부의 지옥온천을 순례하듯 느긋하게 바라볼 영화였다. 마치 반성에 대한, 회개에 대한 우리네 전형적인 고전 답안과도 같은. 중후반 지옥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낸 비주얼과 불경을 인용해 제리 골드스미스의 'Ave satani'를 연상케 하는 음악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단지 (아무리 사극이라 해도) 지옥을 그렇게 원시적으로만 표현해야 했을까. 군부 독재를 연상시키는 허장강을 보며 비유와 상징, 그리고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