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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곱창전골의 '나와 같이 춤추자'
    책|만화|음악 2011. 11. 2. 03:21

    더 이상 가요계에서 과거 6-70년대 한국식 싸이키델릭을 온전히 만날 수 있을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걸그룹의 휘황찬란한 각선미와 후덜덜한 섹시 몸매, 동남아를 휘어잡는 남자 근육돌들의 댄스 실력과 가수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발견하는 명품 보컬들의 귀환 속에 고리타분하고 때론 유치하게 들릴 복고지향적인 밴드 사운드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 그 시절 밴드들의 복각도 드문드문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처절한 판매고와 무관심스런 반응으로 시원치 않은 마당에, 기타에 혼을 싣고 전위적일 정도로 락스피릿을 외쳐댈 열혈 보컬과 미친듯이 텍사스 대평원을 달려가는 말발굽과 같은 폭주 드럼을 선보일 밴드의 태동은 사실상 불가능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평범한 락밴드도 방송과 차트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암울하게 인디씬 언저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데, 촌빨 날리는 한국식 싸이키델릭이라니. 흣,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영영 요원해 보일 법한 사운드를 2011년 직접 들고 나온 팀이 있었으니, 사토 유키에와 故시바토 코이치로, 이토 고키 3명의 일본인으로 구성된 '곱창전골'이 바로 그들이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에서 막 채집해온 듯 생생한 그들 사운드에 놀라고, 우리 문화를 그토록 자연스럽게 소화해낸 그들 국적에 또 한번 놀랬다. 이건 신중현의 더 맨과 엽전들, 애드훠, 키보이스, 히식스, 데블스 등이 마치 시간을 잊고 새로이 신보를 발표한 것 같은 착각마저 주었다. 완벽한 이해와 적응 그리고 집념과 열정 없이는 만들어낼 수 없는 사운드다. 그것도 외국인이 해낸 일이라니. 부끄러움과 경이로움이 한데 뭉쳐 싸르르 가슴 한 켠을 울리며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다. 신대철이 프로듀스해 99년에 발표한 그들의 첫 앨범 '안녕하시므니까'가 신중현과 산울림 등 고전의 재현이자 리메이크였다면, 이번에 12년만에 발표한 이 앨범 '나와 같이 춤추자'는 완벽한 고전의 부활이자 보상이다. 싸이키델릭과 포크, 아트락과 뉴에이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식 그룹사운드의 전통과 실험을 이어나가는 그들의 친숙하면서도 대담한 시도는 그간 우리가 잊고 있었던(혹은 의식적으로 외면해왔던) 뿌리와 본질을 속시원하게 들려주고 있다. 전류에 감전된 것만큼이나 짜릿하고, 치부가 드러난 것만큼이나 뜨끔하게.
     
    수록곡은 모두 7곡으로 많은 편은 아니지만, 곡당 10여분이 넘어가는 대곡들이 중간중간 포진해 있어 런닝타임은 만만치 않다. 약동하는 드럼 사이로 지글거리는 퍼즈톤의 기타가 두텁게 깔리면 사토 유키에가 열정적으로 울부짖는 첫 곡 '그대 모습'은 싸이키델릭의 향수와 마력을 동시에 풀어낸다. 마치 그 시절의 노래가 그러했다고 그대 모습에 빗대 복기해내는 듯한 가사 또한 의미심장하다. 타이틀 곡인 '나와 같이 춤추자' 역시 하몬드 오르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키보드와 퍼즈 사운드, 단선적이지만 몽환적인 코러스가 어울러져 싸이키델릭의 진수를 들려주는 노래다. 중독적일 정도로 귀에 들어와 박히는 멜로디, 아름다운 코러스, 환장하는 기타의 조합은 요새 대중가요에선 감히 접할 수 없는 원초적인 싸이키델릭만의 오르가즘을 선사한다. 블루지한 톤의 '월하미인'은 사토 유키에의 현란하면서도 유려한 기타 솜씨를 맛볼 수 있는 대곡. 이펙트가 잔뜩 걸린 싸이키델릭한 기타가 청세포를 유린하며 아찔하고도 아련한 오색빛깔 향수를 펼쳐보인다. 마치 마취된 것 같은, 꿈결을 걷는 기타의 섬세한 포효는 그 모든 시름과 추억, 아픔을 잊게 한다.
     
    강렬한 기타와 속주 드럼, 정확하면서도 그루브한 베이스가 어우러지는 하드락 '그대 생각날 때는'은 역시 복고적인 색채가 일백프로 충만한 곡으로 직선적이면서도 은유적인 가사가 인상적이다. 쫀득거리는 기타와 사토 유키에의 어눌하지만 절절함이 한가득 묻어나는 호소력의 보컬은 곡이 끝나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잔향을 남긴다. 인도와 그리스의 전통악기를 사용해 이국적인 느낌을 선사하는 '물망초'는 심플하고 쉬운 가사와 달리 10분이 넘어가는 크로스오버적인 성향의 포크락이다. 어쿠스틱 기타와 타블라, 유라가 만나 점층적으로 휘몰아치는 현란한 속주는 기묘한 환각적인 도취감을 안겨주며 일렉트릭 악기에선 느끼지 못할 - 어쿠스틱만의 싸이키델릭 감흥을 완성해냈다. 한국적인 풍취의 가락과 선지적인 가사가 인상적인 싸이키델릭 서사시 '가나다라마바사' 역시 10여분이 넘어가는 대곡으로 과연 외국인이 어떻게 이런 음악과 가사를 만들 수 있었을까 감탄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영혼의 불꽃을 마구 발산하는 기타와 그에 못지않게 한(恨)풀이 하듯 털어내는 보컬 또한 그 매력을 극대화시킨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랑했던 그대여'는 처음의 경쾌하지만 애수 어린 멜로디의 한국식 그룹사운드로 돌아와 복고적인 자신들의 색채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몬드 올갠 톤의 키보드와 싸이키델릭 기타, 베이스, 드럼 그리고 코러스가 만들어낸 이 뽕끼 가득한 촌스러움이야말로 정말 감정을 구구절절하게 울린다.
     
    2년전에 녹음이 마무리됐지만 멤버 시바토 고이치로와 매니저이자 제작자였던 홍종수 씨의 작고로 그간 빛을 못보던 '곱창전골' 2집 '나와 같이 춤추자'는 그간 이 땅의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과거 그룹사운드를 훌륭히 되살려냈다. 그건 형태만 갖춘 채 비틀거리며 발을 내딛는 좀비 같은 몰골이 아닌, 드로리안을 타고 완벽히 과거를 체험하고 나타난 고교생의 모습처럼 쌩쌩하기 그지 없다. 우여곡절 끝에 각고의 노력으로 태어난 놀랄만한 결과물에 진심으로 경의와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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