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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얄개들의 '그래, 아무 것도 하지 말자'
    책|만화|음악 2011. 10. 26. 17:12

    얄개들. 조흔파 선생의 소설이 유행하던 1970년대도 아니고 이런 촌스런 이름을 굳이 꺼내든 이 신인 밴드의 저의는 과연 뭘까. 앨범을 처음 받아들고 들었던 생각은 이 밴드 진정성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편견이었다. '장기하와 얼굴들' 이후 인디씬에 유행처럼 퍼진 복고풍 빈티지 사운드에 무임승차한 시대조류의 편승인가. 아님 추억 환기용으로 소비되어지길 바라고 상업적으로 접근한 영리한 계산일까. [세시봉 특집]과 [나는 가수다] 열풍으로 한껏 탄력 받은 과거 히트송에 대한 수요와 트렌드적인 환기는 그 시대를 거쳐온 세대로서 반갑고 즐겁긴 하지만, 지나친 우려먹기와 본질은 외면한 채 과도한 스타일에 대한 집착으로만 해석되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던 것도 사실이기에 유독 색안경을 끼고 민감하게 바라본 것 같다. 그러나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귓가에 경건할 정도로 낭랑하게 울려퍼지는 그들의 거침없는 사운드는 내 이 불손한 마음과 불경한 의심을 깨끗이 정화시켜 주었다. 와우! 얄개들, 얘넨 진퉁이잖아!!
     
    세계 유수의 여타 밴드들이 보통 그렇듯 '얄개들' 역시 20년지기 절친한 동네(둔촌동) 친구 4명이 모여 결성한 락밴드로, 화려하고 박력있는 기교나 달달한 멜로디를 추구하는 대신 보다 기본기에 충실한 - 단단하고 스트레이트한 사운드에 공력을 기울인다. 락이라는 장르 본연이 가진 원초적인 그 단단한 쾌감과 특유의 우직스러운 맛을 말이다. 드럼과 베이스, 기타 각 파트 별로 또렷한 소리들을 전달해해는 존재감이나 합주의 어울림은 아주 무리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모던하면서도 그루브한 감성은 결코 요란스럽지 않은데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만드는 힘을 갖췄다. 거기에 1세대 인디씬의 선두주자였던 '델리스파이스'나 '미선이', '언니네 이발관'처럼 얼핏 힘아리 없는 보이스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들리는 보컬은 수채화처럼 투명스런 그 질감으로 젊은 특유의 허무함과 나약함, 그리고 복잡스런 감성을 담아내고 있어 그들이 주창하는 음악과 아주 잘 어울린다. 강하진 않지만 썩 단단하기 그지없는! 의미를 좀처럼 잡기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쉬운 어휘로 이뤄진 가사의 모호한 이중성도 곡이 가진 분위기를 두텁게 한다. 젊음도 일상도 인생도 그리 쉽게 이해되는 건 아니까. 의도하건 하지 않았건 밴드 '얄개들'은 그 이름만큼이나 얄망궂고 되바라진 데가 있는 음악을 들려준다.

    편견을 싹 거두고 호옷! 귀를 돋게 만든 첫 곡 '청춘만만세'는 역시나 상큼하고 일렁이는 청춘의 햇살 한 조각을 담은 일렉 기타 사운드가 맨 먼저 들어오는 곡이다. 반어적인 제목에, 체념적인 가사로 역설적이게도 젊은 세대의 포기가 체념이 아니고, 또 다른 희망과 도전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이 청춘송가는 노련하고 매끈하다. 앨범 수록곡 중 유일한 연주곡인 '산책 중에 우연히 마주친 외할머니'는 제목이 가진 그 위트와 생활력을 오롯이 간직한 트랙이다. 현란하진 않지만 유려하고 복고적인 진행을 통해 얼마나 그들의 기본기가 갖춰져 있는지 살짝 감상할 수 있다. 두 번째 트랙으로 배치한 부분에 있어 다소 의아스럽긴 하지만 '얄개들'만의 색채를 각인시키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 뒤를 이어 고조와 점층의 매력이 도드러지는 '눈알에 눈물'은 제목만큼이나 독특한 매력을 던져주는 노래다. 운률을 맞춘 가사, 서정적인 멜로디라인의 반복, 쌓여가는 드럼, 상승하는 기타의 조합이 어우러져 듣는 이에게 짙은 상흔을 남긴다. 4박 5일 동안의 짧은 시간 속에서 이뤄진 원테이크 연주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좋은 호흡과 탄탄한 연주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리고 테라피처럼 향긋하게 기타 사운드가 울려 퍼지는 본 앨범의 타이틀곡이자 가장 뚜렷한 멜로디 라인을 갖춘 '우리 같이'가 시작된다. '델리스파이스'보다 서정적이고, '미선이'보다 활력 넘치며, '언니네 이발관'보다 그루브한 이 모던락은 앞선 인디씬 1세대에게 느꼈던 그 모든 색채감을 가진 - 기시감의 노래다. 모던하고 세련된 연주, 영롱한 기타톤, 정갈한 보이스가 독특한 화법의 가사와 어우러져 만드는 분위기는 정말 아름답다. 그 뒤에 이어지는 '메주' 역시 초반에는 '언니네 이발관'과 '미선이'를 섞고, 후반에 '델리스파이스'로 양념을 치면 이런 노래가 나오지 않을까 상상하게 만드는 마이너한 감성의 곡이다. 유치하면서도 역설적인 가사가 가진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이 사랑스런 노래는 알려준다. 스트레이트하고 드라이한 질주감이 전반을 지배하는 '불구경'은 이들의 락스피릿 충만한 감성을 유감없이 즐길 수 있는 트랙. 속주나 폭주가 지배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 곡 중 가장 거침없이 달리는 이 노래는 불구경이라는 은유적인 화법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다. 가장 그룹 이름 '얄개들'에 걸맞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화창한 날에'라는 노래에서다. 마치 70년대 유수의 한국 그룹사운드에서 들을 법한 복고적인 스타일과 보이스톤으로 그때 시절 느낌을 성공적으로 복기해냈다. 현재의 젊음과 그 시절의 젊음이 묘하게 닮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암울하고 자조적인 가사도 퍽 인상적이다.

    짧지만 일탈적이고 강렬한 디스토션으로 화두를 여는 '꿈이냐'는 올초 발매된 그들의 첫 앨범이자 디지털 싱글의 타이틀곡으로 앨범에서 가장 헤비한 연주를 담아내고 있다. 정직하지만 아련한 기타와 듬직한 베이스, 단단한 드럼이 만들어내는 이 꿈결같은 시간은 모던락을 떠나 싸이키델릭한 감흥까지 선사하며 그들이 락 전반에 걸쳐 가지고 있는 호기심과 실험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황홀경의 간주가 일품이랄까. 이런 분위기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단조롭고 우울한 매력의 '슬프다 슬퍼'가 바로 뒤에 배치된 건 좋은 노림수다. 아무 것도 아닌 이유로도 공허하고 슬퍼질 수 있는 감성을 담아낸 이 마이너한 소품은 슈게이징 밴드와는 또 다른 차별점의 멜랑꼴리함을 던지며 나른하고 불안한 감정을 공유한다. '우리 같이'와 '꿈이냐'와 함께 디지털 싱글에 실렸던 '2000cc'는 제목이 던지는 심상만큼이나 자유스러운 감성이 빛나는 노래다. 질주 본능의 속주 플레이나 실린더가 폭발할 것 같은 드럼비트를 갖추진 않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사의 절망감과 달리 이 쫄깃한 베이스라인에 프리한 기타의 알랑거리는 사운드는 편안히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마지막 트랙을 장식하는 '꽃잔치'는 빈티지 사운드의 절정이자 그들이 들려주는 가장 긴 곡으로 기타가 가진 매력을 120% 발휘하는 순도 높은 슬로우 고고다. 후반부로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달리기 시작하는 블루지하고 싸이키델릭한 고조감이 엔딩곡으로 손색없는 각인 효과를 남긴다.
     
    자신과 100% 딱 맞는 취향의 밴드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설령 만난다 한들 그들도 세월이 지나면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다. 초기의 결심은 언제든지 주변 여건에 따라 흔들릴 수 있는 거고, 시대의 조류를 타 인기를 얻을 수도, 혹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거다. 그러기에 밴드가 걷는 길은 사람 사는 일과도 비슷한 것 같다. '얄개들'의 담백하면서도 실속있는 데뷔 앨범은 98% 싱크로율을 자랑했다. 그들은 큰 야망과 기깔난 테크닉으로 청자를 압도하진 않지만, 15년이 넘어가는 인디씬 1세대들에게서 느꼈던 충격파와 2011년 현재 젊은 세대의 우울한 감성이 공존하는 락의 순수함으로 절로 찬사를 외치게 만든다. 조금 이르지만 감히 올해의 데뷔 앨범으로 뽑을 수 있을 만큼 탄탄하고 명징한 사운드의 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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