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자료원
-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영화|애니|TV 2009. 12. 16. 23:57
매번 헷갈린다. 황야의 건맨인지 무법자인지. 아니 석양이었던가. 차라리 원제를 말하는 편이 더 알아듣기 쉽다. 좋은 놈, 나쁜 놈 그리고 추한 놈. 달러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 작품이자 스파게티 웨스턴의 정점에 올라선 스펙타클한 배신과 음모의 대서사시. 드디어 조그마한 TV 화면에서 벗어나 큰 스크린의, 잘 복원된 필름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몇 번을 봐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 편집은 세 시간이란 긴 런닝타임을 무색하게 만든다. 돈 냄새를 쫓아 속고 속이고, 같은 편이었다 뒤통수 치고 다시 한 배를 타는 야욕의 거대한 소용돌이는 유머와 허무, 폭력과 낭만를 적절히 곁들이며 능글능글하니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고전 서부영화를 엿먹인다. 경배하라, 레오네!
-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영화|애니|TV 2009. 12. 15. 23:55
박영한의 입담도 입담이지만 이를 기가 막히게 영상 언어로 표출해낸 장선우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초기의 그는 돈키호테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놀라운 천재성을 입증해보였다. 구질구질하면서도 희극적인 상황의 아이러니와 관조하듯 꿈을 꾸듯 사회를 진단하는 시선의 생생함은 효과적이고 디테일한 미장센과 만나 속이 꽉찬 작품을 만들어 냈다. 걸진 대사와 섹스, 억척스런 폭력과 달리 화면 안 장선우의 연출은 사랑스런 여인을 보듬듯 부드럽고 섬세하다. 그들의 손짓과 몸짓에 욕망과 낭만이 꿈틀대고, 가난 속의 소주와 미싱엔 찌든 때와 같은 삶의 애환과 피로가 묻어난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불륜 이야기며, 지긋지긋하지만 그래도 견뎌낸 여자들의 이야기고, 식으믄 그뿐인... 러브 스토리다. 100억짜리..
-
양익준의 '똥파리'영화|애니|TV 2009. 12. 6. 23:58
어딜 가나 똥파리 같은 존재들이 있다. 늘 더러운 데 꼬이고, 이 세상에 별 필요도 없을 법한데 생존해 있는 그런 골치 아픈. 그렇다고 특별히 강한 것도 아니고, 그냥 콱 눌러 죽일 수도 없고, 애매모호한 포지션으로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리고 마는. 인생에 스쳐 지나가는 껌딱지보다도 더 불유쾌한 존재들. 양익준은 그 존재의 태생을 깨어진 가정과 대물림되는 폭력에서 발견했나 보다. 퍽하면 치덕이는 욕설과 동방예의지국을 엿멕이는 폭력이 주는 불편함은 그런 똥파리의 존재감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관계와 소통, 사랑의 아이러니를 깨닫기 위해선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 표현은 항상 올곧지 않고, 거짓은 진심의 다른 모습이니까. 그 얼얼함이 수반된 고통과 이해를 거쳐야 숙성된 포용력과 깊은 설..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영화|애니|TV 2009. 11. 27. 23:12
떠나는 자는 말이 없다. 남겨진 자는 의문을 갖는다. 그들이 던지고 간 일상의 수수께끼를 과연 풀 수 있을까. 아니. 영영 해답은 없다. 살아가는 내내 그 화두는 잊혀졌다 떠올랐다를 반복하며 남은 자들을 괴롭히지만, 결코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추측과 예상만이 그려질 뿐, 막상 내게 아름다운 한줄기 빛이 내려와 저 바다로, 철길로 끌어당긴다 해도 떠나는 그 순간에도 답을 알 순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풍광과 일상의 세밀한 묘사로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부재의 고통'을 담아내는 조용한 강렬함은 [환상의 빛]이 가진 힘이다. 부차한 설명과 뚜렷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아도 우리 곁에 만연한 죽음의 일상은 언제나 납득하기 어렵다. 부재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익숙함은 결코..
-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영화|애니|TV 2009. 11. 24. 23:15
물 속에서 평온하게 부유하는 해파리의 독은 치명적이다. 천사의 모습으로 악마의 기운을 품고 있는 그런 이중성이야말로 구로사와 기요시가 포착한 젊음이다. 나른하면서도 몽롱한 현실감각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며 제목과 달리 막막하고 정체된 소통단절의 초상을 담담하니 담아낸다. 그럼에도 부유하는 청춘은 서서히 강물에서 바다로 나아가는데, 그 시간의 흐름을 통한 성장에서 소통하려는 의지를 읽어내고 밝음을 이야기한다. 여러 작품을 통해 인간 본연의 기저에서 심리적 공포감을 탁월히 뽑아낸 바 있는 그이기에 젊음의 불안하고 미성숙한 감정의 폭발을 섬세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오다리기 죠와 아사노 타다노부의 만남도 화제였지만, 무엇보다 다양한 메타포와 미장센을 보여주며 정적이면서도 과잉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밀레니엄 초의..
-
이시이 소고의 '꿈의 미로'영화|애니|TV 2009. 11. 17. 19:00
몽환적이고 탐미적이다. 짧은 일본 고전 기담을 읽듯 은은하게 올라오는 서늘함과 정갈한 색기가 조용히 어우러진다. 강렬한 흑백 대비가 만들어낸 인생의 암(暗)과 명(明)의 뚜렷한 이미지들은 잘 골라 의미를 꽉꽉 눌러 채운 시어(詩語)처럼 망막에 알알이 박힌다. 뜨거운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위험한 사랑을 감수한 여성의 적극적인 모험담은 파괴와 허무에 도취되는 일본 특유의 미학과도 맞닿아있다. 설명을 가급적 배제한 채 긴장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이시이 소고의 탄탄한 연출력과 여백의 감성은 아름답다. 꿈 속을 헤매듯 긴 터널을 빠져나와 마주치는 빛의 스펙트럼에 현실감을 잃고 방향을 더듬이는 코미네 레나의 모습도 잊을 수 없고. 타다노부는 그냥 타다노부답다.
-
고영남의 '깊은밤 갑자기'영화|애니|TV 2009. 7. 27. 23:56
또 한 편의 잘 만든 국내산 80년대 명품 호러 스릴러. 지금은 흔해 빠진 부부 간의 미묘한 관계를 다룬 이 영화는 그 당시 막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과감한 애로티시즘을 적극 활용해 대담한 성애씬과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촬영 테크닉으로 시선을 확 끌어당긴다. 멀게는 [레베카]와 [가스등]을, 가깝게는 [원초적 본능]을 연상시키는 플롯(윤삼육 각본)에, 독특하게 토테니즘(목각인형)과 샤머니즘(무당의 딸)을 결합시켜 줄곧 긴장감을 유지하는 연출력(고영남 연출)도 수준급이지만, 남성성이 강조된 남편 역에 윤일봉, 히스테리컬하면서도 섬세한 부인 역에 김영애, 백치미 한 가득한 글래머 이기선의 적역 캐스팅이야말로 이 영화를 극강으로 만들었다. 남편의 애매모한 행동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며 심리적으로 부인을 조여들어가는..
-
이규웅의 '두견새 우는 사연'영화|애니|TV 2009. 7. 24. 23:54
영화는 뻔하디 뻔한 고전 통속 멜로물을 취한다. 윗마을과 아랫마을, 양반댁과 천민의 동명이인(!)에서 오는 비극이랄까. 느리디 느린 호흡으로 사랑에 버림 받는 여인네의 기구한 신세 한탄이 구구절절 주부 대상 라디오 사연처럼 소개된다. 그러다 후반 10분. 갑작스레 인저리 타임에 역전골을 꽂아넣는 축구팀 마냥 호러와 판타지로 돌변하며 소복 귀신과 무당, 뮤지컬스런 극락 세계가 순식간에 펼쳐지는데, 어느새 끝날 시간! 그러다보니 복수와 용서, 화합이 충분히 녹아들기에는 당연히 무리다. 생뚱맞게 해피엔딩으로 서둘러 끝맺는 급박한 결말이 지금 보면 퍽 당혹스럽다. 김지미와 신성일이라는 두 청춘스타의 이름값에 기대 신파극을 제대로 펼쳐보이는 이 영화는 정통 호러라기 보단 TV 시리즈로 익숙한 '전설의 고향'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