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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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동급생'책|만화|음악 2010. 2. 10. 23:41
동급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다른 동급생을 좋아한다. 뻔하지만 간결한 멜로 드라마로 도입부를 여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은 미스터리라기 보단 청춘물에 가깝다. 트릭도 동기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뿐더러, 사실 희미하고 또 그마저도 쉽게 유추 가능하다. 꿰맞추는 퍼즐보다 맞추는 사람이, 그 어긋난 추억이 핵심이다. 요네자와 호노부같은 유쾌발랄달콤한 코지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두근거리는 이팔청춘 성장통이 담긴 단내나는 이야기는 풋사과 같은 시린 상큼함이 있다. 여전히 쉽고 빠르게는 읽히지만 강렬함은 없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무난스런 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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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브루투스의 심장'책|만화|음악 2010. 1. 22. 02:38
도서형 추리소설의 가장 불편한 점은 주인공과 나를 도무지 일치시키지 못하겠다는 거다. 준법 정신이 강력하게 박힌 바른생활 사나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질 걸 뻔히 알고 보는 스포츠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겨서 찜찜, 져도 화가 나는 승부에 도무지 몰입감이 안 생긴다. 아일즈의 '살의'를 읽다 몇번이고 던져버렸던 건 그런 심적인 부담감이 강해서였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기서 절충안을 던진다. 반은 도서형이지만 나머지 반은 퍼즐형으로 바꿔버리는. 살인 릴레이라는 스릴 넘치는 트릭도 재밌지만, 그대로 벌어지지 않는 사건의 역전성이 뭣보다 X구멍 죄이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읽는 순간 독자를 마취시키는 능력은 좋은 작가만이 가진 미덕이다. (히가시노의) 문제는 책장을 덮으면 그대로 휘발되는 글들도 상당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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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옛날에 내가 죽은 집'책|만화|음악 2009. 12. 13. 18:03
최근 몇년간 유행이 되다시피한 일본소설의 붐 안엔 언제나 그의 이름이 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와 함께 일본 미스터리의 한국 침공에 녹록지 않은 역활을 해낸 첨병. 주력 장르인 미스터리, 스릴러 외에도 유머, 환상, 로맨스 및 단편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의 다재다능한 필력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찍어낸단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많은 작품수를 자랑한단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작품질이 다소 들쑥날쑥한 편이지만, 공통적으로 쉽고 빠르게 읽히는 페이지터너로서 장점만은 잃지 않는다는 게 그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최근 들어 기교와 구조에 치중하는 면이 없지 않은 감도 있지만, 비교적 초기작에 해당하는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은 한정된 시간과 적은 인물, 제한된 공간에서 과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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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우의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 '영화|애니|TV 2009. 12. 1. 04:00
각색은 필요악이다. 영화화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과정이지만, 그 각색이 원작을 갉아먹기 때문에. 성공을 위해 택한 변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성공을 가로막는다. 잘 되면 본전, 대부분은 쪽박. 재조립의 길은 항상 어렵다. 900 페이지 분량에, 20년에 가까운 시간, 방대한 인물이 쏟아져 나오는 [백야행]을 두 시간짜리 영화로 만들기 위해 변신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요체는 그 변신한 모습이 잘못됐다는 데 있다. 소설은 이기적이라 할 만큼 차겁고 드라이했고, 일드는 닭살 돋지만 눈물 빼는 신파 멜로였다. 영화는? 시간에 쫓겨 분위기만 조성하다 멍청해졌을 뿐이다. 문어체적인 대사는 어색하고, 칼처럼 날이 선 캐릭터들은 무뎌졌으며, 계속된 백조의 호수는 거슬린다. 좋은 배우와 스탭들을 데리고도 그 역량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