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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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항해술.잡담 2012. 9. 27. 04:51
비행기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날아갔다. 소리에 비해 속력은 빠르지 않았다. 노인학교 컴퓨터 실습실에서 보이던 마우스질만큼 더딘 속도였다. 마우스 포인터처럼 작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노인들의 팔에서도 종종 그런 느낌을 받았다. 세월의 무게감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다져진 신중함과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두려움과 경이가 섞여 의지의 속도를 경감시켰다. 신경의 무던함과 근육의 낡음도 한몫했다. 그들의 느림은 처량했다. 여유조차 구질구질하게 다가왔다. 느림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남은 건 슬픔뿐이었다. 굼벵이같은 비행기가 늦여름의 짜증을 더했다. 유난히 큰 소음이 존재감을 부각시켰고, 느림을 강조했다. 비행기는 원래 빠름빠름빠름 하며 지나가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저 파란 하늘을 유유히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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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영화|애니|TV 2009. 1. 13. 22:32
빌 게이츠는 말했다. 인생은 불공평하다. 그것에 익숙해져라 라고. 아니 그전에 찰스 사이크스가 먼저 외쳤던가. 냉정하고 잔인한 말이지만, 사실 사는 게 그렇다. 누군 운 좋고 잘 풀리고, 누군 재수없고 먼저 간다. 인생은 나그네길. 벌거숭이. 그래두 옷 한벌은 건졌잖소. 80대 노인 몰골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는 인생을 짊머진 벤자민 버튼의 고된 길을 느릿느릿 잔잔하게 반추하는 이 흥미로운 서사극 역시 그 진리에 힘을 실어준다. 불공평하지만 익숙해지면 살아볼만 하다는. 유머와 사랑, 시간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가장 중대한 테마를 솜씨 좋게 버무려 놓은 채. 데이빗 핀처는 대가로서의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고전 할리우드 서사극을 보듯 2시간 40분이 넘어가는 방대한 러닝타임 동안 한 사람의 일생을 간결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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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잎 클로버 인생.잡담 2008. 1. 30. 05:25
뭔가 특별하고 거창한 삶을 살거라 생각했다. 매번 악당들이 실패하는 지구 정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모험과 스릴로 점철된 곡예 속의 인생길을 걸어갈 것 같았고, 능력과 자질도 받쳐주리라 여겼다. 다빈치가 울고 갈 두뇌에, 알랭 드롱 못지 않은 외모, 천부적인 운동 신경을 소유한 육체를 부여받은 지구상의 단 한 명의 존재가 될거라 빌었다. 그리고 그런 내 곁엔 바벨 2세에 나오는 3명의 부하 로뎀과 로프로스, 포세이돈 같은 존재가 보좌할거라 믿었다. 크고 나서 깨달았다. 어린시절 내가 만화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는 것을. 대다수 사람들은 무료하고 만족 못하는 세잎 클로버 인생을 산다는 것을. 한 장의 잎을 더 단 인생을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확률의 싸움을 뚫고 태어나야 한다는 지를. 바램만으론 절대 이루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