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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유정의 '7년의 밤'
    책|만화|음악 2011. 4. 6. 06:14

    세상의 모든 부정(父情)이 부정(不淨)하다면 그건 부정(不正)한 일일 것이다. 그럴 일이 없기만을 두 손 모아 닳도록 빌 뿐이지만 현실 저편에서 들려오는 뉴스의 태반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자극적이고 인면수심의 파렴치한 범죄와 폭행의 흔적들이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을 만큼 잔인하고 엽기적인 수준까지 다다랐다. 상식과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감정과 본능만이 남아 꿈틀대는지 그런 사건사고에는 도통 이성과 논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술이라는 이유로 감형되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화합과 용서를 구하는 현실이 더 이상 그대로 용납되어선 안된다. 그러나 그 상황을 바로잡기엔 우리나라 경찰들은 너무 할 일이 많고, 과거 정권에 빌붙어 사법살인까지 자행했던 법집행부는 무능하기 짝이 없으며, 정치권은 부의 세습에 지편 내편 가르기에 여념이 없다. 세상의 정의? 그딴 건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돈과 권력이 없다면 꿈도 꾸지 마라.
     
    착하게 사는 게 멍청하다고 비웃는 사회 속에서, 제발 그 거지같은 오지랖 좀 치워달라고 일갈하고 싶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두 아버지는 나름 자신의 부정(父情)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것이 누가 옳고 틀리건 간에 이미 시작되어진 그 진흙탕 싸움은 자신의 모든 걸, 아니 그 세계 전부를 던져버리게 할만큼 큰 감정의 파고와 상처, 그리고 고통을 안겼다. 7년 후에 그 사실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독자들은 현재와 과거의 교차로) 받아들이게 되는 주인공 역시 한 수 한 수 복기해나가는 패배한 바둑기사의 심정만큼이나 쓰리고 아프게 다가온다. 작게는 두 가정의 아버지를 통해, 크게는 한 시골 마을의 계층 간의 차이를 통해 이 시대의 아픔과 현실에 대해 냉철하게 바라보는 정유정의 이 소설은 그러나 그 무게감이 주는 부담감과 상관없이 꽤나 잘 짜여진 예측불능의 스릴러다. 그것도 헐리우드 영화 못지 않은 구조와 적절히 로컬라이징된 상황이 잘 녹아든 세계관으로 무장한, 아주 끔찍스런 악몽의 서스펜스 스릴러. 500 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분량에 걸맞게 머리 속에 그대로 그려지는 풍경 스케치와 디테일한 인물 간의 심리 묘사, 정성스레 취재한 자료 조사를 통해 구현된 리얼리티한 지식들까지 한데 맞물리며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전작인 [내 심장을 쏴라]에 이어 이 작품으로 그녀는 한국형 페이지터너로서 손색없는 실력과 완성도, 두 마리의 토끼를 거머쥔 게 아닐까 싶다. 제프리 디버나 마이클 코넬리, 할런 코벤의 스탠드 얼론이 부럽지 않고, 다카노 가즈아키와 기리노 나쓰오의 재미 못지 않다. 문학적인 장식과 감상적인 태도는 뚝 잘라버리고 깊이감과 속도에 주력하는 지극히 매마르고 건조한 시선은 국내 여성작가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면이고 또 더할 나위없이 파워풀하다. 판을 읽어내는 솜씨가 좋았던 작중인물 최포수 마냥 전체적인 드라마 셋팅에 능하고 역동적인 캐릭터들을 구축해냈다. 책의 두께에 비해 조금은 단선적이라 할 수 있는 구조가 못내 아쉽긴 하지만 광기 어린 내면의 더께와 마주치는 순간 그런 잡념은 어느새 휘발되고 만다. 다 읽고 나니 책을 붙잡고 있던 앞 뒤 책날개가 축축하다. 유령처럼 부유하던 소설 속 세령호에 마치 빠졌다 나온 듯 끈적하고 차거운 사건의 감상물들이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붙어있다. 아마도 그 텁텁한 뒷맛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독이 빠지듯 천천히 새어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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