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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루이즈의 'Video 1'
    책|만화|음악 2011. 4. 29. 05:45

    음악을 글로 표현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 감성과 흥분을 온전히 전달하는 건 물론 어렵겠지만 적당한 미사여구와 진실만 담겨있다면 충분히 그 이상의 떨림을 선사할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다. 좋은 멜로디와 아름다운 화음만큼이나 세상엔 멋진 단어들과 훌륭한 문장이 있으니까, 리듬도 템포도 운율도 모두 대체할 수 있을거라 싶었다. 그렇게 귀로 듣는 음악을 눈으로 보는 음악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착각했었다. 맞다. 그건 어이없는 착각이고, 주제 넘은 오판이었다. 눈으로 보는 음악은 귀로 듣는 음악에 비해 도통 신이 나지 않았다. 실감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궁금했고, 짠~하고 온 몸에 울려 퍼지는 전율이 부족했다. 음악은 설명과 이해가 아닌 감정이었으며, 그건 1차적으로 뉴런 시냅스에 와닿는 0.001초의 반응과도 같은 빠르기가 필요했다. 글은 그러기에 너무 느렸다. 너무 단조롭고 너무 밍밍했다. 기타의 프레이즈를 화려한 수식어로 풀어내면 풀어낼수록, 그 강렬함은 줄어들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루했다. 음악은 벌써 끝나 조용한데, 단락은 아직도 문장들로 두툼하니 쌓여 남아있었다. 음악을 글로 표현하는 건 무리였다.
     
    여기 그런 청각적인 음악을 (감히) 시각적으로 표현해보겠다고 나선 맹랑한 밴드가 있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격렬하게 퍼부어대는 기타 사운드에, 뜀박질 후 약동하는 심장 소리 같은 2비트 쿵딱 드럼, 그리고 이 모든 걸 감싸안고 심연으로 빠져들어가듯 무게추를 잡아주는 베이스로 중무장한 3인조 엘루이즈가 바로 그들이다. 게다가 요즘 아무도 듣지 않는 펑크락 사운드란다.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편성에, 현란한 기교와 복잡한 코드가 필요없는 장르지만, 그만큼 좋은 곡을 만들기도, 또 실험성과 욕심을 갖추기도 어렵기에 그들의 도전이 얼핏 무모하게도 보인다. 아름답고 화려한 수사들이 판치는 메인 스트림을 거부하고 이처럼 투박하고 거친 비주류에 뛰어든 그들의 진심은 무엇일까. 빔 벤더스의 영화 [밀리언달러 호텔]에서 나온 몽환적인 등장인물(밀라 요보비치)의 이름을 딴 배경에 힌트가 있을지 모른다. 세상과의 소통을 닫았지만 누구보다 아름답고 순수했던 그녀에게 말이다.

    맥을 짚듯 잔향을 남기는 베이스와 영롱한 기타의 합주가 어루어지다 거침없이 폭발해 질주하기 시작하는 첫 곡 'Video 1'은 그 경쾌함과 달리 난해하기 그지없는 가사들로 꽉꽉 채워져 있다. 중의적인 표현이자 복합적인 함의가 담겼다고는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하게 다가오진 않고, 입속 천장에 붙은 껌이나 달콤한 시럽, 사탕껍질 같은 맛과 연관된 단어들로 비유된 부분들 때문에 꽤나 감성적인 멜로디라인이 달달하게 느껴진다. 펑크 특유의 다이나믹함이 감지되는 '진심을 너에게'는 이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상당히 대중화된 화법이 인상적인 노래다. 여전히 다층적인 가사는 어렵고 부담이 되지만, 멜로디 자체는 깔끔하고 시원하며 두 대의 기타가 만들어내는 트레몰로와 황홀하리만큼 현란한 스트로크는 듣는 이를 몽롱하고 노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질풍노도라는 청춘의 일면을 잘 담아낸 듯한 가사이자 붕대로 감은 얼굴이 담긴 자켓이미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미성년' 역시 락 기운이 펄펄 끓는 노래. 짧지만 강렬한 인상이 아주 매력적인 곡이다.
     
    '미성년'까지가 밝고 경쾌한 A side곡이라면 마이너한 기운을 듬뿍 담은 'anti'부터는 자유와 저항이라는 펑크 모토에 가장 잘 어울리는 B side의 시작이다. 초현실적이고 반항과 모호한 상징들이 곡 전반을 지배하는 가사처럼 곡의 분위기 역시 전위적이고 피폐한 기운이 감지된다. 거친 기타의 울부짖음에 비해 보컬이 약하게 다가오는 게 조금 아쉽다. 관계에 대한 소통과 확인을 담아내는 '기록'은 그들만의 러브송. 역시나 급진적이고 드라마틱한 구성을 갖추고 있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노래는 아니다. 다만 비판적이고 획일화되지 않은 관점에서 바라본 시각의 참신함과 내실있는 연주는 포스트 펑크의 비전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펙트를 잔뜩 걸어 노이즈처럼 다가오는 연주 위로 청명하게 울리는 기타와 거의 뭉개져 웅얼거리는 채로 배경에 깔리는 보컬 그리고 약동하는 드럼이 만들어낸 연주곡 아닌 연주곡 'Cut'은 그들의 실험성이 극대화된 트랙이다. 1분 30초라는 짧은 연주 시간 동안 더 극한으로 밀어붙여 인더스트리얼적인 색채까지 넘보는 그들의 강단은 그저 놀랍다고나 할까. 불편함 속에 작은 진실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말랑말랑하고 잘 다듬어진 기성 대중가요들 사이에서 작고 단단하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갖춘 엘루이즈의 펑크락은 굉장히 이질적이고 실험적이다. 경쾌하고 신나는 펑크를 넘어서 다층적이고 중의적인 미디어 이종교배를 꿈꾸는 그들은 이제 대중과의 접점까지 노리고 있다. 그것이 인디라는 한계를 지녔고, 다소 치기 어리고 미성숙하다 해도, 이 험한 세상 꿈꾸고 도전하기에 멋지고 아름답다. 그래, 그렇다면 나 역시 글로서 표현되어진 노래로 한 옥타브 안에 숨겨진 조합보다 더 다층적인 화음과 멜로디를 상상할 수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실패는 할지언정 그것을 좌절이라 생각치는 않을테다. 엘루이즈의 음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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