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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보경의 'The First Day'
    책|만화|음악 2011. 2. 9. 14:34

    매일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나날. 나아질 기미가 전혀 없는 시궁창 같은 현실. 꿈꾸는 것조차 사치일만큼 어려운 형편. 계속된 고난과 시련 앞에서 신데렐라를 떠올린다. 요술봉을 휘두르면 호박을 마차로, 부엌쥐를 근사한 말로, 굴러다니던 먼지를 보석으로, 재투성이 아가씨를 공주로 변신시켜줄 그런 기회나 은인을 말이다. 인생역전.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의 해피엔딩은 이 지긋지긋한 일생에 기분 좋은 마침표와 같은 인장이니, 누구나 두 팔을 뻗어 힘차게 움켜쥐려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동화 속 이야기일뿐,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가난한 예술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다 굶어 쓰러지고, 자신의 노래를 직접 구워 팔다 뇌출혈로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아직도 어둠 속에서 내일이란 꿈을 꾸며 오늘과 싸우고 있다. 우리가 슈퍼스타 K2 김보경에게 환호를 보냈던 건, 그 꿈이 얼마나 값진 지 알기 때문이고, 또 이런 지리한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숨겨진 욕망의 대리전을 내심 바랬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김보경은 최종 Top11에 들지 못했다. 진솔한 음색으로 아픈 과거사를 토로하며 화려한 신데렐라가 되었던 자신의 우상 켈리 클락슨과 달리, 누구보다 많은 주목과 박수를 받았음에도 12시 정각이 지나자 마법이 깨어진 재투성이 아가씨처럼 기타를 싸들고 냉랭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눈물을 흘렸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많이 아쉬웠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디지털 싱글과 드라마 OST에 참여한 후 이렇게 나온 첫 번째 미니 앨범 'The First Day'가 증명한다. 슈스케2에 참가했던 후보자들 중 제일 먼저 발매한 이 EP가 그녀의 노력을 말해준다. 새벽녘 안개처럼 허스키한 음색에 가녀린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워풀한 보컬, 진솔한 감정을 담아낸 음악에 대한 진정성은 단순히 방송과 넷힘에 의해 만들어진 벼락 인기와 무관한, 그녀의 음악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 비록 수록곡이 5곡에 불과한 미니 앨범이라 그리 큰 진폭의 다양성을 담아내진 못했지만, 대중들이 바랬던 그녀만의 색깔을 보여주는 데엔 성공했다. 지금까지 디지털 음원차트에서 선전하고 있는 그녀의 노래를 보라.


    단촐한 피아노 반주에 무심한 듯 체념한 듯 힘 빠진 목소리로 시작하는 'Brand New Day'는 이내 생기 넘치는 보컬로 고조되더니 강렬한 기타 사운드와 극적인 스트링이 합류, 세련된 팝으로 변모해간다. 마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듯 좌절과 시련이 닥쳐도 당당히 털고 일어나라는 밝고 희망찬 가사가 인상적이다. 쉬운 멜로디에 의존하기보단 극적인 포인트를 갖추고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인다는 점에서 현재 트렌드를 잘 반영한 깔끔한 팝 사운드. 그 뒤를 잇는 '하루하루'는 현재 음원차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바로 그 곡으로, 김보경의 시원스런 가창력 포션이 제대로 폭발하는 노래다. 본 앨범의 프로듀서이자 현재 가장 잘 나가는 작곡가이기도 한 김태성이 작곡한 곡으로 김보경의 매력과 특징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이별에 아파한다는 흔한 가삿말이지만 감정을 듬뿍 담아낸 채 상콤하게 내지르는 파워풀한 고음부는 가히 전율이 일 정도. 그래서 하루하루가 일년같다는 절절한 절규가 뼈에 사무치듯 다가온다.
     
    분위기를 바꿔 기타로 포문을 여는 달달한 발라드 '봄처럼'은 사랑이 다가오는 순간을 노래한 곡으로 설레임과 불안함이 교차하는 그 믿기지 않는 찰라를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기타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그녀의 단아한 포크(Folk)적인 목소리는 앞선 두 트랙과는 전혀 다른 색채감을 선사한다. 고음과 파워가 없어도, 또 기교가 없이도 이처럼 풍부한 전달력을 지닌 그녀의 기본기에 감탄 또 감탄. 그 다음 트랙은 그녀가 직접 작곡에 참여한 '널 생각하며'. 통통 튀는 발랄함과 유쾌함이 곡 전반을 지배한다. 어쿠스틱과 일렉 기타 사운드의 조화도 좋고, 같이 작곡한 안은진의 화음도 잘 어우러진다. 날씨 좋은 날 동네 한바퀴 산책하고픈 기분이 마구마구 드는 상큼한 포크락. 힘을 뺀 채 가성을 넘나드는 시원스런 그녀의 보컬은 여전하다. '하루하루'의 인스트루멘탈 버전을 빼면 실질적인 마지막 곡인 '눈물은 잊어'는 업 템포의 신나는 노래로 묵중한 일렉 기타에 낮게 읊조리는 후렴구가 파격적이다. 그녀의 고음이 기타에 다소 묻히는 감이 없진 않지만, 워낙 강렬하고도 절묘하게 매칭이 된 맛이 있는 곡이라 신선하다. 실연에 대한 노래지만 희망적인 가사가 첫 곡인 'Brand New Day'와 묘하게 댓구를 이루는 것도 재밌다.


    한계를 지닌 올드한 목소리라는 심사위원들의 평을 보기 좋게 비웃고, 자신의 색깔을 유감없이 보여준 김보경의 미니 앨범은 그녀가 다양한 가능성과 포용력을 가지고 있음을 만천하에 밝히고 있다. 연습생을 거쳐 인위적으로 오랜 시간 조련된 붕어빵 아이돌과 다른 - 풋풋하고 정제되지 않은 거친 모습으로 현재 트렌드에 어울리는 팝사운드에서 포크, 락에 이르기까지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소화해내는 걸 보니 왠지 모를 뿌듯함과 짠함이 함께 돋는다. 비록 마법에서 깨어났지만 유리구두로 해피엔딩을 거머쥔 신데렐라처럼 김보경은 자신만의 유리구두를 찾아 내일 향해 좌절하지 않고 달려가 씩씩한 동화를 완성해내지 않을까. 사뭇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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