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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imutti의 'Rest'
    책|만화|음악 2011. 1. 30. 17:18

    클래식. 서양의 전통적인 고전 음악. 할머니가 아이를 재우며 흥얼거리던 민요 자락이나 택시나 버스에 올라타면 주구장창 흘러나오는 전통가요와 달리 딱딱한 음악당 의자에 앉아 슈트를 갖춰 입고 신묘한 표정으로 감상해야 할 것만 같은 무게감이 존재한다. 요즘은 모짜르트 태교다, 음악 영재다 하며 조금은 실생활에 가깝게 접근한 듯 하지만, 어디까지나 교육 열풍에 기대었을 뿐 아직까지도 이 동방의 작은 등불의 나라에선 클래식이 할머니 민요 자장가만큼 체화되기란 쉽지 않다. 비교적 인기를 끌었던 폴 모리아 악단이나 엔니오 모리꼬네, 존 윌리암스의 영화음악들이 연주음악에 대한 거리감을 좁히긴 했지만, 그들은 예전과 달리 타계했거나 팔순을 넘긴 영감님들이 되었고 음반 시장의 악화일로로 더 이상 연주음악은 예전만큼 인기를 누리지 못한다. 하물며 클래식은 소수 매니아층만이 감상한다는 인식이 강한 상황. 아이돌이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 상품으로 대우받으며 이슈화되는 현재, 클래식이 대중적 호응도를 얻기란 류현진이 4연타석 홈런 맞기만큼이나 버겨워 보인다. 그런데 클래식팝이라니. 게다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
     
    이 무모한 도전에 멋지게 그리고 환상적으로 응한 건 비뮤티(홍범석)라는 음악가다. 적지 않은 나이에 박식한 가방끈을 자랑하면서도 돌고 돌아 처음 공부했던 음악으로 다시 안착한 드라마틱한 사연의 주인공. 성악 전공자임에도 정작 성악이 아닌 크로스오버로 첫 발을 디딘 그의 데뷔 앨범엔 엄청난 의욕과 대범한 시도들로 가득 차 있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고급스럽고 풍성한 연주, 미국 정상급 믹싱 엔지니어의 참여, 익숙한 클래식을 비뮤티式으로 새로 쓴 영어 가사, 아트라 말할 수 있는 속지 그림들. 그리고 빼곡하고 친절하게 각 작업에 대한 코멘트가 적힌 라이너 노트까지 하나 하나에 정성과 노력이 배어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는 건 음악 자체에서 흘러넘치는 열정의 퀄리티로 자뭇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기교와 파워를 최대한 자제하고 오로지 앨범 주제에 걸맞게 '휴식'에 집중하는 그의 중저음의 부드럽고 편안한 보컬은 기계음에 익숙해진 우리네 일상에 신선한 한줄기 바람이 되어 흐른다. 할머니의 자장가보다 더욱 달콤하게. 천사의 속삭임처럼.


    1. Dear Father (Puccini's 'O Mio Babbino Caro')
    두터운 오케스트라 선율에 은은한 플루트, 그리고 어쿠스틱 기타로 시작하는 이 곡은 푸치니가 생애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페라 '쟌니 스키키'에 나오는 'O Mio Babbino Caro(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로 너무나 잘 알려진 아리아. 아름답고 간곡한 딸의 청을 담고 있는 원곡을 아들의 입장에서 변주해낸 시선이 참신하고 아름다운 가족애가 진득하니 묻어난다. 플루트와 기타의 조화가 미성의 중저음과 제법 잘 어울리는 시작.
     
    2. Rest (Chopin's 'Nocturne #2)
    누구나 듣는 순간 아 이 곡!이라 외칠 쇼팽의 녹턴 Nocturne #2에 가사를 붙인 노래. 쇼팽에 어울리게 김바로가 연주하는 피아노가 전면에 나서는 가운데 풍성한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자연스럽다. 본 앨범의 타이틀곡이자 주제를 관통하는 노래인 만큼 극대화된 편안함이 온 몸을 노근노근하게 이완시킨다. 야상곡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비뮤티의 꿈꾸는 듯 몽환적인 보이스가 빛을 발한다.
     
    3. Your Voice (Saint-Saens' 'Mon Coeur S'Ouvre A Ta Voix')
    잔잔하면서도 서정적인 현악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앞선 두 곡에 비해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데,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에 나오는 'Mon Coeur S'Ouvre A Ta Voix(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라는 아리아가 원곡. 데릴라가 삼손을 유혹할 때 나오는 곡이지만 여기선 남자의 고백송으로 바꿔 불러 득특한 질감의 열정과 파워가 느껴진다. 부드러움 속의 힘이랄까.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트랙.
     
    4. Be My Bride (Erik Satie's 'Je Te Veux')
    일생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인해 만들어진 에릭 사티의 이 곡'Je Te Veux(난 당신을 원해)'는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형식미가 아름다움을 선사하는데, 여기에 영어 가사를 붙여 청혼가로 재해석한 비뮤티의 발상이 재미있다. 미니멀한 색채의 원곡을 이렇게 아름다운 왈츠풍의 노래로 밝고 상쾌하게 완성해낸 솜씨도 탁월! 역시나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빼어난 연주에 어우러지는 보컬을 즐길 수 있다.
     
    5. Boat (Faure's 'Pavane')
    궁정무곡이라 일커러지는 파반느. 가브리엘 포레가 작곡한 이 관현악 소품은 서정적이면서 날렵한 맵시가 두드러지는 곡인데, 이를 바리톤 Jass Kim과의 듀엣곡으로 편곡해 색다른 - 장중함의 분위기를 안긴다. 클래시컬한 정통 창법과 소프트한 크로스오버의 창법이 이질적인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서사를 창출하고 있는 셈. 인생이라는 여정 자체도 꿈과 현실의 듀엣송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 마음을 쏙 전달하는 듯 하다.


    6. 너의 아주 오랜 꿈
    앞선 클래식의 새로운 접근법에서 벗어나 타고르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가사를 가지고 비뮤티 자신이 홍민석과 공동으로 완성한 노래. 피아노와 오보에의 청아한 음색으로 포문을 열지만 너무 느끼하게 속삭이는 도입부가 조금은 부담스럽다. 바로 전 트랙의 듀엣곡처럼 바리톤 Jass Kim과 협연을 이루었지만 안타깝게도 조화로움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7. It's A Heartache
    사포를 문지르듯 까끌한 보이스 컬러로 '여자 로드 스튜어트'로 불린 보니 테일러의 77년도 명곡을 이렇게 나른하게, 이렇게 부드럽게 소화하다니! 업 템포의 어덜트 컨템포러리로 기억되던 이 곡이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힐링 계열의 사운드로 변신했다. 주적주적 내리는 빗소리와 첼로의 조화가 인상적인 트랙.
     
    8. She Believes In Me
    역시나 비뮤티만의 편곡은 계속된다. 컨트리 가수로 널리 알려진 케니 로저스의 78년도 히트 넘버를 자신의 색채감으로 변화시켰다.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린 '갬블러' 앨범에 실렸던 곡이자 싱글 컷트로도 높은 인기를 끌었는데, 특유의 호소력 짙은 창법과 카리스마로 극적인 감정을 배가시켰던 팝송이었다. 이를 편안하게 그러나 고조부에 이르러선 풍부한 성량으로 커버하는 비뮤티의 정제된 창법이 인상적이다.
     
    9. 별빛 가득한 편지
    앞선 케니 로저스의 'She Believes In Me'를 한국어로 개사한 곡. 원래는 전전 트랙인 'It's A Heartache'도 한국어 버전이 있었는데 수록 과정에서 짤렸다는데, 아무래도 원곡에서 오는 감정과 번안곡에서 오는 감흥이 꽤나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사 자체는 좋으나 본 노래에선 그다지 임팩트있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흠.
     
    10. Lonesome Blues
    앞선 '너의 아주 오랜 꿈'에 이은 홍민석의 곡으로 재지(jazzy)한 사운드가 일품인 노래. 바바라 스트라이잰드, 스티비 원더와 작업한 바 있는 Mike Lang의 수준 높은 피아노 연주도 좋지만, 제법 재즈와 어울리는 음색의 비뮤티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너의 아주 오랜 꿈'에서 부담스럽게 느껴지던 느끼함이 오히려 여기선 빛을 발한다. 굉장히 서양적인 장르에 어울리는 음색이 아닌가 싶기도.


    11. Parole
    이탈리아의 Mina와 Albert Lupo가 부른 71년 원곡보다 프랑스의 Dalida와 Alan Delon이 부른 리메이크곡이 더 유명한 이 노래는 국내에서 모 대출 광고 CF에 쓰여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원래는 남자가 나레이션을 하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형식으로 남녀간의 소통 불능에 대해 담고 있지만, 여기선 비뮤티가 (영어로) 나레이션과 노래를 모두 담당했다. 여성 보컬이 부럽지 않을만큼 부드러운 미성의 노래도 좋지만, 중저음의 나레이션은 귓가에 달라붙어 안 떨어질만큼 매력적이다.
     
    12. The Winner Takes It All (소프트록 버전)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스웨덴 혼성 밴드 ABBA의 곡. 이 곡을 모르면 간첩이라 할만큼 워낙 유명한 노래인데, 이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해 전혀 다른 감수성을 만들어냈다. 솔직히 다른 곡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변형이 이루어졌는데, 어쿠스틱 기타에 첼로 연주는 서정적인 묘미를, 일렉 기타에 오르간은 그 속에서의 강렬한 힘을 선사한다. 
     
    13. The Winner Takes It All (댄스 버전)
    앞선 트랙보다 이 버전이 더 익숙할 듯 싶은데, 강렬한 비트감을 제외하곤 ABBA 원곡에 가까운 진행을 선보인다. 비뮤티 역시 후렴구에서 기교없이 깔끔하면서도 파워풀한 성량을 자랑하는데, 이제까지 서정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조금 튀어보이는 게 사실. 그럼에도 워낙 대중적인 넘버인지라 신나게 들을 수 있는 트랙이다.
     
    14. Volare (Original Title: Nel Blu Dipinto Di Blu)
    원제는 '파랗게 칠해진 푸르름 속에'라는 뜻이지만, '볼라레'로 더 유명한 이 곡은 58년도 산레모 페스티벌에서 우승한 칸초네. Domenico Modugno가 부른 곡이지만 워낙 많이 리메이크가 이루어져 인기를 끌었으며,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곡이 아닐까. 바로 전 트랙의 댄스 비트에 이어 역시나 빠른 템포를 구사하고 있으며, 이때까지의 서정적인 휴식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지만, 흥겹고 유쾌한 감수성이 또 다른 의미로 편안함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15. Volare (No Intro)
    앞의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호세 카레라스의 인터뷰가 담긴 인트로가 삭제된 버전.


    각 트랙마다 비슷비슷하고 획일적으로 들리는 스타일이 단조롭긴 하지만, 인스턴스식으로 한 곡만 빠르게 소비되는 현 음악 시장에서 이처럼 단일한 컨셉을 우직하니 밀고 나가는 뚝심과 정성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유럽 10대 지휘자로 손꼽히는 디안 쇼바노프는 와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 같다고 했는데, 개인적으론 지치고 피곤한 일상, 휴식같은 노래로 마음을 치유하는 좋은 처방전과 같은 음악이 아닌가 싶다. 지쳤다면 과감하게 떠나라!...가 아니라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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