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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지영의 '여행을 떠나자'
    책|만화|음악 2011. 1. 8. 07:59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날은 여전히 춥고 매섭다. 차가운 바람 아래 숨은 내일을 찾아보려 기웃대지만 뚝 떨어진 기온이 이내 그 작은 움직임마저 멈추게 만든다. 아직은 이불 속 뜨끈한 온기가 그리울 때. 변화를 맞이했음에도 자꾸 밍기적거린다. 빳빳한 새 달력 아래 큼지막히 적힌 년도가 생소하다. 학창시절에 읽던 SF 소설 속 숫자다. 몇 번의 시도 끝에야 간신히 저 숫자가 올해라는 걸 연관짓겠지. 달라진 게 전혀 없는 일상이지만 그렇게 변화는 조금씩 다가온다. 인식하고 인정하고 다시 인식하고 인정하고. 천천히 익숙해지는 작업이 새해에 내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그건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과 비슷하다. 달라진 주변 환경에 눈을 크게 뜨고 불안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두근 반 세근 반의 심정으로 연초를 맞이한다. 새 달력의 새 날은 시간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연말을 맞이하며 그리고 연초를 준비하며 받아든 앨범은 그런 의미에서 고맙게도 '여행을 떠나자'라고 노래하는 이지영의 첫 싱글이었다. 영혼의 목소리 빅마마의 일원으로, 그 전에는 한상원 밴드의 보컬로 활동한 바 있는 그녀의 보이스는 가는 해 오는 해에 걸맞게 차분하고 정갈하다. 파워풀 넘치는 카리스마와 가슴을 탄복케 만드는 절정의 가창력이 조화된 빅마마를 기억한다면 조금 의외일수도 있지만, 이전 앨범에서 간간히 비치던 솔로 작업들을 떠올려본다면 그녀의 이런 모습이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다. 단지 소울 충만한 필링으로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던 블루지한 색채감 대신 묵직한 비음 섞인 절제된 창법으로 그룹 빅마마의 이지영과 솔로 이지영의 차이를 만들어낸 듯 하다. 여전히 감미롭고 재즈보컬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찰진 목소리지만 보다 편안하고 담백해진 깊이감이 성숙하고 감동적이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맞이하듯 청아하게 심벌이 울리며 기분좋게 시작하는 '여행을 떠나자'는 편안하면서도 부드럽게 속삭인다. 누군가에 기대 잠시 쉴 수 있는, 가슴 가득 아쉬운 기억들을 모두 날려 버릴 여행을 떠나자고. 그 들뜬 감흥을 잔뜩 품은 이 희망찬 가사와 함께 산들거리는 보사노바의 따사로운 사운드는 이소라가 부른 '청혼'을 떠올릴 만큼 사랑스럽고 매혹적이다. 극세사 수면 바지를 입은 듯 포근한 허스키함이 돋보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중간 간주의 스캣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를 한다. 분위기를 달리 하는 두 번째 곡 '송년회'는 이지영이 직접 작곡한 발라드. 담백하지만 인상적인 그녀의 작곡 실력과 동시에 후반 폭발하는 가창력을 유감없이 감상할 수 있다. 여기에 힘을 보태는 건 90년대 최고의 작사가로 박주연과 함께 양대산맥으로 이름 날린 박창학 씨. 섬세한 감수성과 아름다운 문체, 곡에 딱 맞춰 재단된 분위기를 선사하던 그답게 애절한 심정이 뚝뚝 묻어나는 노랫말을 주었다.
     
    그 뒤를 잇는 (실질적으로 이 싱글의 마지막 곡인) 'Over the Rainbow'는 빅마마 4집에 실렸던 자신의 솔로곡을 어쿠스틱 버전으로 재편곡한 곡이다. 그녀가 역시 직접 직사/작곡했던 노래로 사랑에 대한 설레임과 풋풋한 행복감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독특한 건 일본어로 Balancer를 뜻하는 라틴밴드 바란사 バランサ가 연주에도 참여하고 있다는 것. 따라 이전의 상큼하고 가볍던 느낌은 카바킨호, 판데이로, 탄탄 등의 독특한 질감의 지역색을 띈 악기로 대체돼 듣는 재미를 안긴다. 빅마마 때라면 전혀 상상도 못할 파격과 발랄함이다. 중간 간주에서 이지영의 스캣 대신 기타 솔로가 들어간 '여행을 떠나자(GTR ver)'과 아예 그 부분이 대폭 줄어든 '여행을 떠나자(radio ver)'이 다시 이어지면 약 20분간의 짧은 여정이 끝을 맺는다.


    디바들의 당차고 가슴을 저미는 화음을 뒤로 한 채 여행 프로그램의 나레이터로, 또 여행 작가로 자신의 취향을 유감없이 커밍아웃한 이지영은 첫 싱글마저 '여행을 떠나자'며 빅마마 때와는 또 다른 출발을 알린다. 그 가벼운 발걸음이 담긴 그녀의 노래는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요즘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선물이자 새해 결심과도 같다. 가만히 차오르는, 낯설도록 설레이는 행복함을 안고 다들 신년에 걸맞는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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