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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리오의 '오아시스를 만날 시간'
    책|만화|음악 2010. 11. 13. 02:06

    한때, 아주 정말 한때 음악을 해야겠다 맘먹은 적이 있다. 그건 계시였다. 기타 코드도 못잡고, 양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눌러본 적도 없으며, 절대음감은 커녕 화음넣기나 돌림노래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면서 말이다. 댄스와 힙합, R&B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브릿팝에 열광하던 이십대의 난 멍청할 정도로 무모했고, 황당할 정도로 게을렀다. 그러면서 꿈꾸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세상만사 쉽게 적응할 리 없었다. 대체복무시절 어설프게 화성학 책을 보며 공부하던 동갑내기 후임과 박사를 준비하던 나이 꽤 드신 시간제 강사 후임을 꼬드겨 카피밴드부터 차근차근 밟아 나가겠다 작당까지 했었다. 록스피릿만 있으면 그까짓 연습이야 전혀 문제 없을거라 여겼다. 매력적인 보이스와 비주얼은 갖추지 못했지만, 솔직히 믹 재거나 노엘 갤러거도 그다지 잘 생긴 건 아니잖아 웃어넘겼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록스피릿(!)이니까.


    '오아시스를 만날 시간'을 읽으며 오래 전에 잊혀진, 소녀 아이돌 홍수에 행복해하며 침 흘리던 가슴 한편 조용히 잠들고 있던 록스피릿이 꿈틀댔다. 무대 앞에 늘어선 수많은 관중을 담아낸 표지를 보는 순간, 전율과도 같던 일렉 기타 소리가 온 몸을 관통하며 그만 깨어나라 소리치는 것 같았다. 심장은 부셔져라 질주하던 드럼질마냥 분노를 담아 쿵쾅댔고, 흐리멍텅하던 정신은 둔중히 메아리치던 베이스 울림에 점차 맑아졌다. 젊은 날의 그 재밌던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나. 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소비하고 있는가. 꿈꾸기를 멈추는 순간부터 나는 창백한 시체마냥 죽어가고 있었다. 아둥바둥 삶에 매달려도 의미를 찾기 시원치 않을 나날들을. 그건 한없이 나태하고 생기없던 삶에 스콜처럼 퍼붓던 내 안의 절규였다.


    세계 최고의 록페스티벌 글래스턴베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친절한 안내서가 아니다. 흥분에 찬 관람기도 아니고. 두근 반 세근 반 여행기는 더더욱 더 아니며, 그렇다고 사색에 찬 에세이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2005년 7월 런던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 사건, 2009년 8월에 있었던 충격적인 오아시스의 해체, 그리고 2009년 6월 지은이가 직접 다녀온 경험담이 합쳐져 만들어낸 픽션일 뿐이다. 권태로운 일상에 찌든 삶을 벗어나기 위한 소소한 판타지며, 음악의 황홀경에 빠져든 자아도취적 고백담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시원한 자유와 일탈을 맛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야심도, 뛰어난 문체도, 그 흔한 뒤통수 때릴만한 반전도 없지만,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한번쯤은 느꼈던 풋풋한 설레임과 약동하는 젊음으로 공감을 자아내니까. 마치 페스티벌 안 수많은 군중들 속에 뒤섞여 같이 지축을 뒤흔들 정도로 뛰고, 땀 흘리며, 소리 지르는 것 같은 생동감이 담겨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국경을 초월해 음악으로 하나된 사람들의 본질적인 감동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안에 사운드트랙마냥 촘촘히 자리잡은 무수한 명곡들을 빼놓을 수 없다. 내용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너바나의 'Smell Like Teen Spirit', 오아시스의 'Live Forever'와 'Wonderwall', AC/DC의 'Back In Black', 카사비안의 'Shoot The Runner', 제임스 므라즈의  'I'm Yours' 같은 곡들은 물론, 각 챕터별 상징적인 소제목으로 쓰인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쉰의 'Wake Up', 비틀즈의 'A Hard Day's Night'와 'Till There Was You', 존 레논의 'Imagine', 롤링 스톤즈의 'Shine A Light', 스웨이드의 'Bueatyful Ones', 콜드 플레이의  'Fix You', 라디오헤드의 'No Surprises', U2의 'With Or Without You'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팝의 향찬이다. 게다가 글래스턴베리 록페스티벌에 줄줄히 등장하는 릴리 알렌, 스크립트, 프란츠 퍼디낸드, 자비스 코거, 피터 도허티, 파울로 누티니, 리사 헤니건 그리고 브루스 스링스틴 등 아티스트의 면면은 그야말로 이곳이 음악팬들에겐 성지요 천국이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오아시스를 만날 시간'은 중의적인 의미가 담긴 제목이다. 그룹 오아시스를 만나야 하는 시간 그리고 오아시스라는 휴식처를 만나야 할 시간. 그게 어느 쪽이 되었던 살아가며 꼭 만나야 될 시간이 아닌가 싶다. 록스피릿이 충만해진 지금, 애꿎게 먼지 덮힌 CD장에서 록음반들을 헤집어 본다. 다음 페스티벌까진 길고 긴 겨울을 나야할텐데, 이들로 좀 버텨봐야지. 그리고 미뤄둔 악기도 배워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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