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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즈 엔드 걸프렌드의 'Seven Idiots'
    책|만화|음악 2010. 11. 9. 03:19

    어느 정도 음악을 접하고 선택하는 경우는 예외겠지만, 한 번도 듣지 않은 CD를 처음 받아들 땐 묘한 기분에 사로 잡힌다. 비닐을 벗기고, CD를 올려놓고, 이어폰을 꽂으며, 플레이 버튼을 누를 때까지 그 짧은 시간동안 약간의 설레임과 약간의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 이 음악가와 오래 공명하게 될지, 아님 그저 장식장의 장식품이 되어버릴지, 첫 음이 귓가에 울려퍼지기 전까지 상당한 긴장감이 방광을 죄어오는데, 그 쫄깃한 기분이야말로 진정한 음악의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가츠히코 마에다의 원맨 밴드 World's End Girlfriend(이하 WEG) 신보를 받았을 때 역시 수많은 감정들이 머리 속을 헤짚었다. 생각보다 어두운 자켓 이미지에, 우중충한 스테인드 글라스 무늬의 CD 프린팅, 핏빛으로 적힌 뒷면의 트랙리스트에 아차! 싶었던 것. 그런 느낌에 결정타를 박아버린 건 해설지에 크고 두껍게 적힌 '아름답고 기묘한 불협화음'이란 카피였다! 순간 쉽진 않겠구나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귀에 들어온 건 공포영화 속 귀신이 다가올 때 소름돋듯 자주 흘러나오는 줄 뜯기 신공! 잠깐의 공포감에 패닉 상태로 젖어 들었지만, 이내 규칙적인 일렉 기타 루프가 울려퍼지며 각종 현악 음색이 겹쳐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화성의 조화가 하나의 사운드로 뭉쳐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순간, 전율이 머리 속을 강타했다. 우와아아. 대박이군. 현란하고 변화무쌍한 음의 스펙트럼에 시냅스 속 뉴런들이 300년만에 자유를 얻어 탈출하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단테 신곡을 모티브 삼아 역순으로 전개해 나가는 앨범의 구조도 구조니와 포스트록/IDM(Intelligent Dance Music)만의 그 실한 편곡과 노래를 작곡한 후 보컬 파트를 제거해 이를 바탕으로 음악을 만들어낸 실험성은 듣는 내내 입을 벌어지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청량하면서도 스피디한 멜로디에, 기괴한 이펙트와 과감한 믹싱 그리고 클래식컬하면서도 팝적인 감수성을 동시에 보여주지만, 뒤로 갈수록 이 모든 걸 끌어안고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듯한 막장(?) 진행은 가히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대체 이 괴물을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


    앨범의 서두를 장식하는 'The Divine Comedy Reverse'는 앨범 전체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인트로로, 2분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기타를 포함한 각종 현악기의 불협화음과 신디 사운드의 조화를 통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망해낸다. 여기서는 제목이나 앨범 구성과 달리 단테의 신곡처럼 지옥, 연옥, 천국 순으로 전개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파편적이고 장엄한 마무리와 함께 곧바로 시작되는 'Les Enfants du Paradis'는 강렬하고 시원한 기타 속주로 아름답고 환상적인 멜로디를 만들어나간다. 신디와 현악이 뒷받침해주며 산만하다 싶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악곡을 펼쳐보이는 이 곡은 상당히 회화적이고 직접적인 사운드스케이프를 펼쳐내는데, 마르셀 까르네의 동명의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서 나온 마임이 크게 작용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IDM의 특유의 혼돈과 아방가르드함을 뽐내며 마지막까지도 예측할 수 없는 전개로 끝을 맺는다. 역시나 열정적인 일렉 기타의 표효로 시작하는 'Teen Age Ziggy'는 마치 예전에 유행하던 8비트 게임음악스러운 포스를 전달하는데, 사랑스러우면서도 키치적인 색감이 묻어난다. YMO에 빚지고 있는 이 곡은 왜곡된 보이스와 노이즈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화려한 지장을 남긴다.
     
    펑키한 베이스 리듬으로 분위기를 달리한 'Decalogue minus 8'는 섹소폰이 주된 멜로디 라인을 풀어내며 현악과 일렉 사운드 가득한 엠비엔트가 무거운 분위기를 선사하는데, 기괴한 중독성을 느끼게 한다. 테오 엥겔로풀로스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제목의 'Ulysses Gazer'는 그러나 그 사색적인 영화와 달리 강렬한 기타 속주와 파워풀한 바이올린 솔로가 어우러져 비극적인 우아함을 창출해내는 것이 인상적이다. 작업을 해체와 재조합을 통해 완성시킨다는 말이 이해가 될 정도로 파편적이고 변측적인 편곡이 눈에 띈다. 다양한 기타 프레이즈에 비트를 쪼개 쎅소폰과 보이스 등을 박아넣은 'Helter Skelter Cha-Cha-Cha'는 과감한 실험성이 폭풍간지를 불러오는 곡. 아름답진 않지만 비트감이 만들어내는 혼돈의 무아지경은 사이키델릭한 마력을 뿜어낸다. 클래식컬한 스트링으로 시작하는 'Galaxy Kid 666'는 그러나 초반을 지나자마자 일렉 사운드로 변모해 상하고저의 규칙성으로 듣는 이를 현혹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일렉 기타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 강렬한 사운드로 서서히 천국에서 연옥으로 접어드는 중간 단계의 암울함을 담아내었다.
     
    이후 우울하게 시작되는 일련의 'Bohemian Purgatory' 삼부작은 그간의 스피디한 활력과 달리 축 처지고 진중한 사운드로 연옥의 이미지를 연출해내는데, 앞선 트랙들에 비해 보다 직접적인 엠비언트의 활용이 강하게 드러나며 혼돈과 격정에 뒤덮힌 어지러운 세상에 대해 일갈하듯 상징적으로 작용한다. 스트링과 섹소폰, 피아노가 일렉 기타와 결합해 감정을 고조시키는 방식으로 폭주하는 구성은 비슷하나 이 모든 것들이 심정적으로 동기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불편함을 안겨주는 게 그로테스크하고 악취미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즉홍성과 변칙성이야말로 순수한 상태의 음이 가진 속성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들은 지옥을 상징하는 'Der Spiegel im Spiegel im Spiegel'와 'The Offering Inferno'에 이르러 극대화되며 절정을 향해 완벽하게 침전된다. 미니멀한 피아노와 다양한 악기들의 파편적인 음색 그리고 듣기 괴로울 정도로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인간들의 함성과 엠비언스의 총합으로 심신을 황폐하게 할 8분 30초간의 악몽까지. 리스너가 결코 겪어보지못한 지옥도를 두 트랙에 걸쳐 완성해낸다.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를 희석시키며 영혼을 정화시켜주는 건 피아노와 기타 중심으로 연주된 마지막 곡 'Unfinished Finale Shed'다.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수식과 장식을 지워버리는 이 담백한 곡엔 78분간의 천국-연옥-지옥 순례 여행이 즐겨웠냐 반문하는 WEG의 알쏭달쏭한 표정이 담겨있다.


    정형화된 틀 안에서 마주치는 당의정스런 음악과 달리 불친절하고 난해한 방식의 소통에 거부반응이 들지 모른다. 허나 세상에 편안히 잠들 자장가가 존재한다면 잠을 깨울 기상 나팔 소리의 음악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WEG의 신보는 마하의 속력으로 날아와 소닉붐을 안기는 제트기마냥 머리 속 깊숙이 크나큰 잔향을 남긴다. 그것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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