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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V의 '집행유예'
    책|만화|음악 2010. 10. 22. 06:21

    지금 와서 솔직히 고백하건데 90년대초 댄스와 블랙뮤직이 가요계를 침공했을 때 난 꿋꿋이 015B와 이승환 그리고 이른바 동아기획이라 불리는 언더의 음악을 선호했다. 윤종신과 이장우, 김돈규 등의 객원가수제에 환호했고, 더클래식과 이오공감 오태호에 박수를 보냈으며, 푸른하늘과 박학기, 장필순과 김현철, 봄여릉가을겨울 정돈 흥얼거려줘야 음악실에서 껌 좀 씹었구나 찬탄하는 수준이었다. 춤추고 랩하는 건 저기 학급 뒷분단에 앉아 슬랭을 쓰며 분위기 잡던 친구들이 열광하는 거지 가요계에서 음악성 완성도 운운하려면 보편적으로 남들 잘 듣지 않는 노래를 꿰차고 있어야 한다는 - 일종의 허세에 레알 쩔었던 셈이다. 허나 그 이면 숨겨진 사실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건 내가 심각한 몸치/박치라는 것이었다. 춤추다 기름 덜 친 로봇되고, 랩하다 혀 깨물고... 음악적 허세가 생겨난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때 그 시절 유행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대부동의 영역이 존재했으니, 그건 서태지와 듀스라는 강력한 그림자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메이저를 대표하며 여학생들이 팍팍 밀었다면, 듀스는 마이너의 표상으로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락과 메탈을 기반으로 선구자적인 안목으로 블랙 뮤직을 흡수해 과감한 실험성과 나름의 팬시함 그리고 시대의 화두이자 아이콘으로 가요계 판도를 바꾼 서태지와 달리, 테디 라일리를 신처럼 숭상하며 뉴 잭 스윙의 둔탁하면서도 강력한 비트에 오토튠과 토크박스로 가공된 엣지있는 보이스를 완벽하게 한국적으로 이식한 듀스는 파워풀한 안무와 개성 넘치는 외모로 자신들을 어필했다. 용호상박에 태산북두요, 양웅상쟁이라. 아무튼 그들의 음악은 외면하고 싶어도 귀에 들리고, 습관처럼 입에 붙어 나오는 질풍노도의 불경이자 찬송가였다. 그리고 약간의 과장을 보태 UV의 두 번째 앨범을 접하며 그 기시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개그맨 유세윤과 하이사이드 멤버 뮤지가 팀을 이룬 UV는 지난 4월 미니홈피에 장난스럽게 올린 '박대기송(to. 대기)'과 상당히 웃겼던 '쿨하지 못해 미안해' MV로 단숨에 주목 받았지만, 더욱 놀라게 만든 건 막연히 단발성으로 웃기고 말겠지 싶었던 편견과 달리 그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었다. 라임을 딱딱 맞춘 직설적으로 웃기고 심히 공감 가는 가사에, 90년대식 복고지향적인 사운드 그리고 귀에 착~ 달라붙는 각인되기 쉬운 멜로디로 일개 퍼포먼스에 함몰되지 않는 - 음악적 쾌감까지 선사하고 있다. 이후 그들의 상황을 딴 케이블 프로그램(UV 신드롬)과 '은퇴'쇼에, 지속적으로 발표한 몇 개의 디지털 싱글, 싼티나지만 여전히 웃긴 뮤직비디오로 초단기간만에 그들만의 입지를 넓히더니, 이번 두 번째 앨범(이라기엔 여전히 싱글컷에 가깝지만)으로 진지하게 가요계에 정착(?)하려는 야심(!)마저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그 시도는 절묘하게도 내가 거부했던 - 그치만 결국엔 따라 부르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90년대식 그 수많았던 댄스 그룹들 - 앞서 이야기한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를 비롯해, 현진영과 와와, 잼, Ref.와 언타이틀 등의 명암을 마음 속에서 꺼집어내 일렁이게 만든다. 아이돌이 골반과 다리를 흔들고 옷을 찢으며 유혹하는 후크송과는 전혀 다른, 추억의 마력적인 복기인 셈이다.
     
    자신들의 상황(한마디로 대박!)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유세윤과 뮤지의 상황극으로 시작하는 1번째 트랙 'intro (Hey Jean)'는 짧지만 굵고 명확하게 이 앨범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블루지한 음색으로 뮤지가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유세윤이 나와 어깨에 힘 좀 들어갔다며 니가 뭔 뮤지션이냐 일갈을 하는데, 여기에 뮤지가 피아노를 강하게 내리치며 반응을 보인다. 이는 그들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던 항변이 아니였을까. 그리고 유세윤이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건 그들을 널리 알려준 '박대기송!'. 이것이 대중들이 그들에게 바랬던 색깔이었을텐데, 이를 그대로 받아 부르는 뮤지의 보이스엔 언뜻 생기없는 처량함마저 비쳐진다. 그러나 곧 이를 거부하고 전복이라도 하겠다는 듯 강렬한 파열음이 터지면 나이트에서 흔히 접해봤을 법한 강렬한 테크노/유로비트 사운드가 울려퍼지며 기대(?)를 배신한 완성도의 음악이 펼쳐진다. 2번째 곡 '999'는 그 시절의 추억을 완벽하게 복기한 격렬한 빠암 빠빠빠~ 신디 사운드가 전면에 깔리며 어설프면서도 중독성 심한 구구구 라임과 유치하지만 뒤집어지는 가사로 이마를 그리고 박자를 치게 만든다. 3번째 곡이자 타이틀 곡인 '집행유예'는 듀스의 뒤를 잇는 듯한 뉴 잭 스윙 댄스곡! 심지어 가사 어휘마저 듀스 스타일을 적절히 모사해가며 21세기 사랑 세태를 풍자하는 여유마저 부린다. 단순한 카피를 넘어선 오마쥬의 느낌마저 풍기는데, 그 시절을 관통해온 가요팬에겐 반가움이란 이름의 향수와 만나게 되리라.


    B사이드를 알리듯 4번째 트랙의 짧은 - 그렇지만 열광적인 분위기를 담은 'Skit'이 지나가면, 얼핏 느끼한 바비 브라운이 떠오를 법한 5번째 곡 'game'이 이어진다. 술자리에서 흔히들 즐기는 왕게임을 모티브 삼아 완결성 높은 가사로 재미를 듬뿍 안기는 이 쌈빡한 얼반 힙합은 뮤지의 호소력 넘치는 보컬과 유세훈 특유의 건방 떠는 랩이 어우러져 인상적인 질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곡 '쿨한나'는 1집때 발표한 '쿨하지 못해 미안해'의 연장선상에 놓인 노래로, 레게 비트가 깔리며 천하의 개찌질한 모습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낸 가사가 익살스런 랩으로 승화돼 웃음을 자아낸다. 여기에 흥을 돋구는 건 사랑의 카운셀러로 호흡을 맞췄던 강유미의 피처링. 이렇게 한바탕 20분 조금 못되게 놀다보면 진한 아쉬움이 남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니 이들의 음악을 더 실감나게 듣기 위해선 뮤직비디오까지 감상해야 한다. 쌍팔년대 뮤비들이 가진 촌스러운 질감을 그대로 살리기라도 한 듯 블러를 이빠이 먹여 뽀사시한 질감을 선사한, '집행유예'의 의도적인 촌스러움은 노래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게다가 어린 시절의 유세윤이 직접 심취한 댄스를 추는 클립까지 중간에 삽입돼, 그들이 90년대 음악에 가진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새삼 실감나게 한다.

    이들의 다음 행보는 과연 무엇일까. 기대하면서도 궁금하게 만드는 UV 당신들은... 욕심쟁이, 우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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