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보면 안되는 거였다. 후배 이슬이가 건네줬을 때도 마다하고 거절했어야 한다. 아니, 내게 일단 고양이에 대한 얘길 꺼내면 안된다.
기르지도 않는 동물에다가 이름까지 붙여가며 불러 제끼는 판에 이 책을 읽으니 콜라에 멘토스 빠트리는 꼴이요, 설사에 관장약 먹는 셈이 되고 말았다. 지금 난 애타게 주위를 돌러보며
'안토니오 까를로스 복남'을 부르고, 베개를 고양이 삼아 실성한 사람처럼 쓰다듬고 있다. 어머니께선 이런 내 모습에 눈이 시린지 꼴깝 떤다며 방을 나가셨다.
게더스는 행복한 양반이다. 내가 가장 기르고 심은 고양이 중에 하나인 스코티시 폴드를 기르며 이런 유쾌한 글마저 썼으니. 이게 바로 기쁨이요, 인생의 즐거움이 아닐까. 고양이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 고양이도 묘(猫)요, 묘하다 할때도 묘(妙)자를 쓰는 게 분명하다. '파리에 간 고양이'는 진정한 고양이빠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 감수성과 즐거움을 편안한 친구에게 두런두런 수다떨듯 풀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우리 가족들이 이 책을 본다면 분명 동네 생활정보백과를 밀어내고 라면받침으로 쓸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