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덴도 신의 '대유괴'책|만화|음악 2008. 4. 12. 22:45
유괴는 가장 비인륜적인 범죄인 동시에 가장 인정에 동(動)하는 범죄다. 그래서 납치범들은 인질을 수단과 도구로 여겨 쉽게 죽이기도 하는 반면, 스톡홀름 증후군이나 리마 증후군이 발생할 여지를 종종 주기도 한다. 이 아이러니 가득한 결과는 그래서 가장 쉽게 일어나는 범죄인 동시에 가장 검거률이 높은 범죄라는 이중성을 낳았다. 그래서 그런 걸까. 참혹한 비극으로 끝나는 현실과 달리 픽션에서 다루는 유괴납치 사건은 기발하고 유쾌한 설정으로 읽는 이를 휘어잡는 명작들이 많다. 레니 에이드의 [아기는 프로페셔널!], 히가시노 게이고의 [게임의 이름은 유괴] 그리고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의 모태가 되었던 이 작품까지. [대유괴]의 매력은 발상의 역전성에 있다. 납치된 82살의 노인네가 오히려 범인을 선동해 유괴사..
-
가와시마 마코토의 '800 Two Lap Runners'책|만화|음악 2008. 4. 2. 02:27
어린시절 그렇게 등수놀이를 싫어하는 내게 달리기는 고문에 가까웠다. 잘 달리고 못 달리고를 떠나 아예 달리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으니까. 이 둔한 몸치가 그나마 나아진 건 고등학교에 들어서며부터다. 그렇다고 천재적인 준족의 실력을 보였던 건 아니고, 단지 체력장 때문에 조금이나마 점수를 높이려면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슬픈 10대 후반의 초상. 근데 그땐 거의 그랬다. 젊음을 불사르며 육체를 마음껏 발산하기엔 너무 멍청했던 거지. 아님 현명했거나. 평균 이상의 운동 신경을 보유한 그들은 경이의 대상이자 초능력자다. 인체 내 근육 구성 비율부터 틀리며, 반응 속도와 감각 그리고 승부욕까지 남다르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현실에선 거의 알아차릴 수 없겠지만, 질주하는 그들과 나는 시간 자체가..
-
미야베 미유키의 '스텝 파더 스텝'책|만화|음악 2008. 3. 31. 05:46
무겁고 답답할 수 있는 사회문제들을 이렇게 가벼운 터치로 그릴 수 있는 것도 그녀이기 때문에 가능한건지 모르겠다. 절도, 납치, 유괴와 강간, 우발적 살인 등 온갖 비리와 병폐들이 쏟아지지만 영악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쌍둥이 형제와 얼떨결에 그들의 계부가 된 도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7개의 연작 단편엔 경쾌한 미소까지 지어진다. 알고보면 참 끔찍한 세상인데, 한발짝만 물러서면 그 부조리들이 실없게 느껴지는 건 이 세상이 조소로 가득찬 아이러니 덩어리기 때문이 아닐까. 폐부를 찌르는 사악한 독기가 허파를 찔러 웃게 만드는 것이 아닌, 그저 멍청하고 잘난 인간들이 잰 체 하려는 데서 오는 불쌍한 자존심이 채플린 코미디를 보듯 나열돼 웃게 만드는, 기분 좋은 씁쓸함이다. 뭘 써도 현대 사회 전반을 바..
-
요코야마 히데오의 '루팡의 소식'책|만화|음악 2008. 3. 24. 23:34
좋은 제목은 떡밥을 넘어 영감을 안긴다. 작은 흥미와 호기심이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결정적이고 중차대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누구나 다 아는 괴도 루팡의 이미지를 '소식'이라는 귀가 솔깃해지는 단어와 결합시켜 궁금함을 자아내는 이 작품은 그 제목만큼이나 강력한 흡입력과 재미로 중무장한 미스테리물이다. 15년이라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과거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그 당시 학생 3명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해가는데, 중간중간 청춘물과 본격 미스테리, 사회파 요소들을 촘촘히 엮어 달리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 작위적이라 느낄 수 있을 만큼 모든 사건을 끼어 맞춘 듯한 결말이 2% 안타깝게 느껴지지만, 모두 다 완벽할 순 없는 일. 분명 재미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후회라는 단어를 전혀 떠오르지 못하..
-
미야베 미유키의 '이름없는 독'책|만화|음악 2008. 3. 15. 23:14
두툼한 분량임에도 걱정하지 않고 집어 들 수 있는 건 미야베 미유키 때문이다. 그녀의 필력이라면 30권짜리 무협추리라도 즐겁게 읽겠다. 필력이 있다는 건 멋진 문장과 대사, 좋은 구조만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다. 정신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흡입력, 그 매력이 글자 하나하나에서 베어나와야 한다. 푹 고아낸 육수 국물에서 우려낸 듯한 아우라가 독자를 감싸고. 누가 어디서 방해를 해도 다시 책을 집어들어 책장을 넘길 수 있게끔 해야 한다. 미야베 미유키는 그렇게 만든다. [누군가]의 후속으로 쓰여진 작품이지만, 설정과 등장인물이 같다는 거 빼곤 직접적으로 이어지지 않기에 이 작품부터 집어들었다. 의심심장한 제목만큼이나 직접적으로 사회와 인간의 독성에 대해 토로하는 이 소설은 그녀의 출발지점이 사회파라는 걸 어김없..
-
아사노 아쓰코의 '배터리'책|만화|음악 2008. 3. 7. 19:52
야구는 재밌는 스포츠다. 단체 경기면서 에이스와 4번 타자가 유난히 도드라지고, 속도가 있으면서도 경기 자체는 상당히 정적이기 때문에. 공격과 수비가 나란히 교대로 병행된다는 점도 그렇고. 이런 이율배반적인 요소들이 어느 스포츠보다 더 길게(무려 9이닝에 걸쳐) 펼쳐진다는 점에서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경기의 핵심이 되는 배터리를 봐도 범상치 않잖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 투수에 비해 언제나 안방 마님 든든한 조연이 되는 포수의 관계에선 서로에게 묘한 애증이 묻어난다. 일본에서 800만부나 팔리고, 만화와 영화, 드라마로 만들어진 이 메가 히트작은 그 이율배반성에 주목한다. 천재적인 투수와 그 공을 유일하게 받아줄 수 있는 포수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야구와 소년들의 성장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
나카무라 코우의 '이력서'책|만화|음악 2008. 3. 6. 18:01
이력서를 써본 사람들은 안다. 자신의 인생을 몇 줄로 요약해 적어내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황망한 일인지. 고작 이 몇 줄 늘리려고 지난날들 살아왔나 싶어 푸념 아닌 푸념이 세어나오기도 한다. 빈 칸이 많이 남고, 쓸 말이 없을 때 인생 헛살았구나 싶기도 하고, 없는 일 가공하거나 부풀릴 때 누굴 위해 내 인생 각색하나 싶어 답답해지기도 한다. 과거가 어땠고, 진짜 이름이 뭔지 알 수 없지만, 한자와 료는 그런 이력서 대신 자신의 일상사를 소소히 기록한 이력서를 만들어간다. 대체 가족인 누나를 얻게 된 것부터, 주유소 취직, 거기서 만나게 되는 여자 친구와 누나 친구와의 첫키스까지. 아무 것도 아닌 시시콜콜한 일상사를 담은 자신만의 특별한 이력서를 만들어나간다. 짧고 임팩트 없는 담담한 이야기를 ..
-
요네자와 호노부의 '봄철 딸기 타르트 사건'책|만화|음악 2008. 2. 19. 22:28
라이트 노벨에 대한 특별한 거부감은 없지만, 라이트 노벨이란 말 자체는 싫다. 소설의 경중이 뭐가 중요하냐 싶어서. 소설이면 다 같은 소설이지 라이트급, 미들급, 헤비급 같은 체급 구분이 필요한가 우습기도 하고. 사실 괜한 트집이요, 딴지다. 그냥 꿀꿀한 기분과 스트레스로 가벼운 작품이 보고 싶긴 해서 골라 집었다. 그럴 땐 상당히 도움이 되더만. 빨리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달짝지근한 제목만큼이나 안전한 추리소설이다. 살인이나 유괴, 폭력이 나오지 않으니까. 어찌보면 일상의 평범하고 작은 사건들의 연속이다. 때론 밍밍하기도 하고, 소소하기도 한... 범인을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트릭이 궁금하긴 하지만 딱히 알려고 들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고만고만한 사건이 5 편 연작으로 묶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