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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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은 아프다.잡담 2012. 12. 9. 23:21
조짐이 좋지 않았다. 이미 5번이나 미끄러질 뻔한 기운을 간신히 추슬러 걷고 있던 터라 다음에 찾아올 위기엔 뭔가 사단이 나겠거니 막연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양손에 든 짐 또한 결코 균형을 잡는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진짜 최악이었던 건 바로 신발이었는데, 하도 오래 신어 밑창이 맨들맨들해진 마찰계수 제로의 구두였다. 미끄럼엔 그저 쥐약. 마치 힐리스처럼 빙판길에선 쭉쭉 미끄러졌는데, 다리에 잔뜩 긴장을 머금은 근육과 초집중 정신력으로 가까스로 제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깜빡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이하이의 ‘여전히 정신 못 차려 왜’란 구절에 정줄을 놓은 순간, 왼발이 미끈! 오른발에 힘을 주는데 역시나 미끈! 아 씨ㅂㅏ...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발이 모두 공중으로 붕 떴다. 중력은 아프다. 허리와 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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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잡담 2012. 12. 7. 04:39
때 이른 폭설이 도래했다. 아직 한겨울이 되기엔 한참 모자란 12월초. 싸래기처럼 날리던 가루들이 이내 굵어져 펑펑 쏟아졌다. 마치 요동을 치며 혼전으로 치닿는 하루하루 같다. 금세 질척해 더러워질 게 분명한데 깨끗한 척 모든 걸 덮는 모습이 가증스럽다. 엉금엉금 기는 차들은 못 봐주겠다. 때마침 버스 엔진에서 들려오는 영감님 가래 소리. 미끄러움을 부끄러운 몸뚱이가 주체하지 못하는 건 사람이나 사물이나 비등하다. 괜시리 서글프다. 녹아서 물기로 엉망이 된 신발에 애꿎게 화를 풀어본다. 더딘 속도의 차들이 점점 도로에 쌓인다. 쌓이는 건 눈과 그리움만이 아닌가 보다. 강추위도 함께 닥쳤다. 겨울이다. 진짜 겨울이 시작되었다. 올해가 가기 전 따뜻한 소식을 꼭 좀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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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지하철 바람과 함께.잡담 2008. 11. 17. 23:05
지하철이 플랫홈으로 미끌어져 들어오며 확 불어닥치는 바람처럼 갑자기 날씨가 매서워졌다. 시큰하고 아릴 정도의 추위 속엔 무딘 커터 칼날 같은 먹먹한 기운이 품어 있다. 옷깃을 여미지만 조그만 틈새라도 치고 들어오는 서늘한 감촉마저 감출 순 없었다. 여린 노인처럼 발발 떨리는 뼈마디. 아이처럼 칭얼대는 몸의 비명. 쪽팔림을 감수하고서 벽에 기대 진동을 멈추려하지만, 벽이 더 차다. 이빨마저 부딪쳐올라쯤에 다행히 지하철에 올라탔지만, 이미 시작된 겨울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욕마저 감출 수 없었다. 아 C8. 열라 춥네. 길고 긴 차디찬 어둠의 계절 속에서 여명을 기다리는 나의 바램은 언제 이뤄질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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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음식|스포츠 2008. 10. 29. 22:00
오랜만에 울집에서 후식으로 나온 귤. 아니 벌써 귤이 나오다니.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좀 차졌다 생각은 했지만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을 줄이야. 정말 딱 재주소년 才洲少年 말대로 벌써 귤 시즌이 찾아왔다는데 놀랐다. 아직 방 한 구석에선 모기가 쒱 활기치고 다니는데, 다른 한 편에선 벌써 겨울을 알리다니. 계절이 무너지고, 자연법칙이 깨지는 혼돈의 시기, 그래도 시간은 가는구나 싶어 조금 서글퍼졌다. 그러나 이내 방 안 가득 퍼지는 달콤새콤한 귤 향기와 귤즙에 노래지는 손을 보며 차거운 겨울 뜨스한 방바닥에 누워 귤 까먹고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세월의 무상함이 쉽게 지워져 갔다. 기분 좋은 후각은 망각을 대동하고 오나보다. 그 귤향기를 오랜만에 다시 맡았더니 작년 이맘때 생각이 나네. 찬 바람에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