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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비빌의 'Dr. Alcohol'
    책|만화|음악 2011. 11. 20. 17:00

    대한민국에서 컨트리라니. 이 무슨 상파울로에서 진도 아리랑을 부르는 조합이더냐 싶지만 의외로 썩 잘 어울린다. [귀를 기울이면]에 나왔던 존 덴버의 개사곡 '콘크리트 로드'보다 백만배나 더 잘. 구수하고 편안한 멜로디에 일상적이고 직설적인 (징글징글한 남자들의 술 얘기가 태반이긴 하지만) 가사를 얹은 노래들은 컨트리 특유의 경쾌 발랄 애수 삼박자를 고루 갖춘 피들과 페달 스틸, 밴조와 만돌린, 하모니카가 곁들어지며 독특한 풍취와 색다른 들을거리를 제공했다. 껍데기 외향은 미국산인데, 알고보니 부품은 한국산이었다는 관광기념품 속에 얽힌 우스개처럼 미국 남부의 사운드를 고스란히 차용하면서도 두런두런 우리네 이야기를 담아내는 모양새는 제법 웃기면서도 능청스런 재미가 있다. 이질적인 양면을 재기발랄한 치기와 실력으로 커버한 게 훤칠하고 익숙하니 놀라웁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정바비, 줄리아 하트의 새콤달콤 싱그러운 맛을 접어두고 가을방학은 좀더 오래 지속한 채 본격적으로다 컨트리 앨범에 매진했다. 그래선가. 5년만에 나온 이 바비빌의 두 번째 앨범. 만만치가 않다.
     
    정바비가 어떤 인물인가. 한국 인디씬의 맏언니 격인 '언니네 이발관'의 창립 멤버이자 주체할 수 없던 당의정, 사카린의 결정체 '줄리아 하트'의 진짜 심장이었고, 봄방학 여름방학 겨울방학은 다 있는데 왜 가을은 없냐며 계피와 함께 담백하니 총대를 맨 '가을방학'의 중추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미국의 솜씨 좋은 원조 장인들의 연주까지 비행기 타고 담아와 물오른 제비마냥 매끈하게 쫙 빠진 맵시와 감동적인 여흥을 준비했다. 장르 자체는 익숙한데, 노래는 친숙하지 않다고? 걱정 붙잡아 매시라. 제목이 후렴구고, 히트곡이 대표곡이라 칭하는 컨트리는 그 어떤 음악보다 빠르고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노래들이다. 흥에 취하고 음에 취하고 술에 취하는 전형적인 음주가무형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컨트리가 주류가 되지 못한 게 되려 이상할 정도다. 적당히 흥겹고 적당히 애수 어린 이 아름답고 감성어린 노래들은 조태준, 조웅, 이원형, 박세회, 무중력 소년과 서영호, 그리고 정바비 등 7명의 개성 넘치는 남성 보컬들이 참여해 제각각 저마다의 스타일로 소화해낸다. 놀랍도록 진솔하고, 환장할 정도로 뻔뻔하면서도, 미치도록 웃긴 그런 젊은 나날들을.

    벤조와 피들이 어우러지며 경쾌한 컨트리의 질감을 유감없이 펼쳐보이는 '술박사'는 술 냄새가 진동했던 바비빌 1집과 연계성이 느껴지는 곡이자 성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알콜에 대한 경험을 풀어내는 노래다. 흥겨운 코러스와 어쿠스틱한 감성이 나긋나긋하며 유들거리는 조태준 목소리와 결합돼 밝고 긍정적인 기운을 선사한다. 그 뒤를 잇는 '잡범'은 센 제목과 달리 나이브하면서도 그루브한 홍키통크 연주가 일품인 노래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멤버 조웅의 나른하니 독특한 음색이 귀를 사로잡는다. 블루그래스 감성의 '스타벅스의 중심에서 오백 세 잔을 외치다' 역시 바비빌만의 허세와 반전을 즐길 수 곡. 마이크 얼드릿지의 페달 스틸 연주와 리처드 전의 피들 조화가 푸근하니 감성적으로 들려온다. 이원열과 박세회의 서로 다른 톤의 듀엣도 인상적. 분위기를 달리해 서정적인 느낌으로 돌아서는 '짤막한 사랑'은 목가적인 발라드. 피들의 애뜻한 느낌과 달리 무덤덤하게 부르는 무중력소년의 칼칼한 목소리가 더 가슴을 울린다. 
     
    바비 블랙의 현란한 본토 페달 스틸이 빛을 발하는 '난 내가 네 애인인 줄 알았어'는 경쾌한 진행 속에 숨겨진 진한 아쉬움과 자괴감을 썬스트록 멤버 박세회의 가녀리고 섬세한 보컬로 표현하고 있다. 아름다운 멜로디에 직설적인 소회가 담긴 가사가 흥미로운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치약의 맛'은 이별의 공허함을 잘 담아낸 노래. 원펀치 멤버 서영호의 담백하지만 가끔 뽕끼가 드러나는 보컬이 얼드릿지의 유려한 페달 스틸과 만나 아려한 추억을 반추하게 만든다. 거의 단편 시트콤의 시츄에이션이 담긴 '케빈'은 본 앨범에서 가장 재미있는 곡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바비빌의 위트가 정점을 찌른다. 포크적인 음색의 박세회 보컬톤도 이국적인 조우 상황에 너무나 잘 어울리고 만돌린이 튀어나와 분위기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경쾌한 포인트도 절묘하다. 드디어 앨범의 프로듀서 정바비가 출격하는 '평생 너만 사랑하고 싶어(근데 잘 안 돼)'는 화끈한 리듬감의 러브송으로 줄리아 하트의 감성을 바비빌식으로 표현한 노래다. 바비 블랙의 페달 스틸이 끈적하니 그 사랑을 강조하는 게 아주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찌와 TJ', '우쿨렐레 피크닉'에서 그 따사로운 감성과 부드러움을 표출해낸 바 있는 조태준의 '서울 부산 428km'는 고향 그리는 심정을 나름 절절하게 담아낸 애수곡. 컨트리라는 장르에 가장 걸맞는 노래이기도 하다. 바비빌의 결론은 가장 가까운 술집행이긴 하지만, 한국의 정서를 담아낸 로컬라이징된 컨트리의 진가는 이게 정답이 아닐까. 실질적인 엔딩을 장식하는 '좋은 의미에서 나쁜 남자'는 펑키한 리듬감의 기타와 피들, 하모니카가 걸쭉하니 남성적인 음색의 무중력소년 목소리와 만나 하드코어 컨트리맨의 음악을 들려준다. 마초적인 허세가 버무려진 아이러니한 가사 또한 걸작이다. 하하하. 이 뒤로 이어지는 건 '스타벅스의 중심에서 오백 세 잔을 외치다'와 '난 내가 네 애인인 줄 알았어'의 MR 버전으로 쟁쟁한 컨트리 사운드 고수들의 진가를 생생히 맛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피들과 페달 스틸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즐길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컨트리라 하면 전원일기 메인테마에 가사를 붙여야 하나 순간 당혹스럽기도 했는데, 그 롤모델을 명확히 제시한 바비빌이 있어 다행이다. 비록 지금은 유일무이하게 K-Country를 시도하고 있지만, 다른 뮤지션들도 관심을 갖고 자신만의 컨트리곡을 들고 나왔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 나라에서 힙합은 어려워, R&B는 안돼 하던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블랙 뮤직 붐을 이끌어 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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