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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재범의 '시티헌터 OST 사랑'
    책|만화|음악 2011. 6. 13. 19:14

    호조 츠카사가 그린 [시티헌터]는 학창시절의 영웅이었다.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던 그때 그 만화 한질이 학교에 돌면 교실별로 초토화됐다. 8교시도 부족했고, 반의 경계도 무의미했으며, 다음날 등교가 기다려질 정도였다. 예약은 기본, 연체는 당연. 순서 어겼다며 주먹과 빗자루질이 오갔으며, 서로 먼저 보겠다고 매점에서 빵과 주스를 갖다바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판치기, 농구와 함께 지긋지긋한 학교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준 도피처이자 즐거움이었다. 최고 실력의 스위퍼지만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고 개가 되어버리는 호색한 우수한, 그에게서 보호를 받는다지만 오히려 100t짜리 망치를 들고 다니며 그를 컨트롤하는 사우리, 몸집보다도 한참 작은 차를 몰고 다니는 숙적이자 동료인 대머리 유광호의 활약상을 보고 있으면 시험이고 성적이고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기묘한 경험에 빠지곤 했다. 그 시절의 추억들 때문인지 원작의 사에바 료나 마키무라 카오리, 우미보즈란 이름보다 우수한, 사우리, 유광호가 더 정겹게 다가온다. 하드보일드하면서도 코믹한 상황과 음담패설이 교차하는 기묘한 분위기는 시간이 지나도 명불허전. 아직까지도 읽다보면 하루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한 만화다.
     
    그런 [시티헌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은 가히 메가톤 급의 충격이었다. 일전에 홍콩에서 왕정 감독이 성룡과 손잡고 희대의 상상치 못할 괴작을 완성한 바 있기에, 이 뉴스는 만화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던 내게 악몽과도 같았다. 과연 이 정도의 성담론(?)을 지상파 밤 10시라는 시간대에 풀어낼 수 있을까? 사우리의 100톤짜리 망치는 어떻게 표현하지? 게다가 그 느끼하면서도 시치미 뚝 떼는 개그 캐릭터를 누가 연기한단 말인가? 등등의 걱정과 우려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쓰나미처럼 가슴 속에 차올랐다. 그러나 막상 드라마계 블루칩인 이민호와 박민영이 남녀주인공으로, 김상중, 천호진, 박상민, 김미숙, 김상호 등의 중견연기자들과 카라의 구하라까지 합류한 캐스팅보드를 접하고나니 호기심 반 기대 반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 한번만이라도 봐줄까 싶어 닥본사를 했더니 주제가를 부른 이가 무려 지금 가장 핫한 가수 임! 재! 범! 그가 누구인가. '나는 가수다'로 이미 돌아온 가객으로 검증이 끝난 희대의 보컬리스트이자 시나위, 외인부대, 아시아나에서 가창력 끝판대마왕으로 대접받던 로커가 아니었던가.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고, 그냥 닥치고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주제가 '사랑'속에.

    가슴을 후벼 파는 듯 마성의 허스키 보이스가 사랑, 그 사랑 때문이라고 조용히 읊조리며 시작하는 이 노래는 Night & Day가 작사 작곡한 잔잔한 발라드다. 피아노와 기타로 받쳐주고 스트링이 합류하며 극적인 전개를 이어가는 방식은 그리 새롭지 않은 - 전형적인 발라드의 품새를 갖추고 있는데, 이를 그렇지않게 만드는 힘엔 임재범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이미 작년 [추노]의 주제가 '낙인'으로 한 차례 구절절한 사연을 들려준 바 있는 그의 황홀한 융성은 여기서도 진득하니 발휘되는데, 감정을 억누르다 독 터지듯 폭발하는 그의 호소력 짙은 창법은 찌질하고 궁상맞아 보일 수 있는 가사 속의 사내를 애절하고도 멋지게 탈바꿈시켜 놓는다. 비록 '나는 가수다'와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 당시 녹음이 진행돼 최상의 컨디션을 보여주진 못하지만, 그 난조마저도 멋과 감정으로 치환시키는 그의 카리스마와 괴물같은 소화력이 정말 대단스러울 정도다. 이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가수가 대한민국에 몇이나 되며, 어떠한 노래를 불러도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가수가 얼마나 될까. 음악은 음학이 아니라는 말처럼 그 본질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그의 노래에 다시금 전율을 느끼게 만든다.
     
    그 뒤를 잇는 건 임재범의 목소리 대신 기타와 피아노가 자리잡은 '사랑'의 어쿠스틱 연주곡 버전들이다. 박주원이 단아하게 한 대의 기타로 연주한 곡은 목소리가 가진 울림과 또다른 서정적이고 클래시컬한 매력이 듬뿍 담겨있다. 기타 버전이 보다 멜로디 라인을 선명하게 부각시켰다면 김지수가 그 뒤를 이어 연주하는 피아노 버전은 보다 모던하고 뉴에이지적인 감수성으로 투명스럽고도 풍부한 여백의 미를 잘 살려냈다. 임재범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강렬한 맛이 빠진 만큼 다소 심심하고 밋밋하게 들리는 감도 없지 않지만, 그런 절제되고 섬세한 감정이 직접적으로 표피로 다가오는 게 나쁘지 않다. 드라마를 보기 전엔 애니메이션에서 흐르던 'Bay in the Night'나 'Spring Breeze' 같은 모던한 퓨전 재즈 스타일이 흐르지 않을까 막연히 짐작했었는데, 이런 어쿠스틱한 러브 테마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 싱글에 이어 앞으로 발매될 사운드트랙들이 기대된다. 이미 샤이니의 종현과 걸스데이가 참여한 곡들이 후속타로 공개된 것 같은데, 온라인 차트를 석권한 임재범의 '사랑'만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사실 원작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흐르던 드라마를 보며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설프게 각색하느니 차라리 아예 전혀 다른 내용으로 가는 게 맞는 방법처럼 다가왔다. 새로운 느낌으로 원작과 비교할 필요없이 보면 되는 거니까. 내 마음 속의 주인공이었던 우수한, 사우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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