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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orillaz의 'The Fall'
    책|만화|음악 2011. 5. 12. 19:49

    약 15년전, 노스트라다무스가 에언한 공포의 제왕을 기다리며 과연 무사히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던 그때. 그래도 이 세상이 무너지고 사라진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되지 않을까 믿고 있었다. 적어도 목소리를 대체하는 무언가가 뜨겁게 열창하고 흥겹게 중얼거린다는 건 감히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기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내 빈약한 상상력을 비웃을 정도로 놀랍도록 변해갔고, 국내 최초 사이버 가수가 튀어나왔으며, 옆의 섬나라에선 보컬 로이드란 녀석이 괴상하고도(?) 어설프게 노래부르기 시작했고, 누구는 개소리를 샘플링해 캐롤을 만드는 한편, 하츠네 미쿠가 붐을 타고 오리콘 차트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제 2의 제 3의 진보된 형태의 보컬 로이드 가수가 꾸준히 등장하고 있으며, 국내 사이버 가수는 벌써 오래전 바이러스로 사망(?) 은퇴했지만, 영국에선 세계 최초 가상밴드 고릴라즈가 바야흐로 데뷔 10년차를 맞이했다.
     
    그래. 이게 바로 현실이다! 예언과 상상이 빗나가고, 영화보다 만화보다 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곳. 이젠 벌써 3집이나 낸 가상 밴드 리더가 '최고의 밴드는 해체를 해야만 최고가 된다'고 선언하고 은퇴를 암시해도 놀랍지 않은 시대가 왔다. 블러의 멤버 데이먼 알반과 '탱크 걸'로 잘 알려진 만화가이자 일러스트 작가 제이미 휴렛이 만들어낸 이 독특한 밴드 고릴라즈는 단발성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고 지난 십년간 숱한 이슈와 야사들을 쏟아내며 무려 총합 15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보컬 2-D의 합류 거부로 인한 리더 머독의 납치 사건이나 죽은 줄 알았던 기타리스트 누들이 살아돌아오는 등의 기행도 기행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장르를 넘나들며 독특한 퓨전 감각과 팝적인 감수성을 담아낸 다크하고 세련된 음악들로 팬들을 열광시켜왔다. 그리고 작년 크리스마스에 줄쑥 웹상에서 아무런 설명과 힌트 없이 새로운 앨범을 공개했다. 3집 [Plastic Beach] 북미 투어를 32일간 돌며 각 지역에서마다 한 곡씩 완성한 곡들을 담아낸, 게다가 아이패드가 주된 악기로 참여한 실험성 가득한 모음집을.

    [The Fall]이란 타이틀을 붙여 나온 이 앨범은 그 인터넷 공개의 오프라인 버전인 셈이다. LP 느낌 나는 양쪽 슬리브 재질에 단촐한 외형이 그간 고릴라즈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선사하고 있으며, 음악 역시 3집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지만 더 극대화된 일렉트릭 사운드의 다크한 포스와 모노톤의 단조로우면서도 중독성있는 향찬은 그들의 현재 처한 고민과 위치를 짐작케 한다. 몬트리올에서 녹음된 'Phoner to Arizona'를 시작으로 단조롭지만 점층적으로 변화되는 일렉트릭 사운드를 중심으로 펼쳐보이는 그들의 다크한 판타지는 쉽게 와닿진 않지만 강렬하고 중독적이다. 첫 곡이 전주에 해당했다면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Revolving Doors'는 간결한 기타 루프와 반복적인 리듬에 맞춰 서늘한 보컬이 빛을 발하는 노래다. 믹 존스의 기타가 참여한 'Hillbilly Man' 역시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중간 이후 강렬한 비트감의 악몽으로 변환되는 재미가 느껴지고, 제목 그대로 디트로이트에서 녹음된 'Detroit'는 일렉 사운드 특유의 경쾌한 멜랑꼴리한 기운이 감지된다. 슬로우 템포로 전환돼 침전된 기운을 무시무시하게 발산하는 'Shy-Town'에 이어 제시 해켓이 키보드로 참여한 'Little Pink Plastic Bags'은 엠비언트 사운드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담아낸다.
     
    강렬한 전자음을 바탕으로 인더스트리얼 스타일로 정신없게 휘몰아치는 'Joplin Spider'에 이어 라디오 잡음으로 인트로를 여는 'Parish of Space Dust' 역시 소음들과 목소리의 다양한 변조들을 통해 독특한 일렉트릭만의 발라드를 선사해낸다. 그리고 그들이 그간 가장 잘 보여주었던 트리합 스타일의 'Snake in Dallas'가 이어진다. 몽롱하고 반복적인 일렉트로니카 속에 숨은 무거운 힙합 사운드의 퓨전성은 예의 고릴라즈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처진 기운 속에 품은 환상적인 분위기의 'Amarillo'가 이어지는데 디트로이트에 이어 아마릴로라는 도시의 기운을 조금은 감지되기도 한다. 대화들이 잔뜩 이어지다 전자음과 함께 카운트가 이어지는 과도한 실험성의 'The Speak it mountains'는 다소 청자를 당황시키게 만드는 트랙. 산타페에서 녹음한 숲과 물소리가 잠시 마음을 정화시키면 카눈이라는 아랍 악기를 활용한 8비트 사운드 'Aspen Forest'가 이어진다. 이국적이면서도 단순한 진행이 마음을 이끄는 곡. 전작에서도 목소리를 빌려준 바 있는 소울 가수 바비 웨맥이 참여한 'Bobby in Phoenix'는 이번 앨범에서 가장 이질적인 분위기를 선사한다. 낭만적인 정서의 블루지한 음색이 일렉트릭과 만나 독특한 감성을 만들었다고나 할까. LA 철도역의 안내와 엠비언스가 깔리며 변조된 음색으로 씁슬하게 그러나 끝으로 가면 업비트로 바뀌는 'California and the Slipping of the Sun'이 흐르면 대망의 엔딩곡 'Seattle Yodel'로 긴 여정을 마무리 짓는다.

    3집 발표와 함께 해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언급한 고릴라즈. 그러나 이렇게 또 데모 모음집이자 팬 서비스 차원에서 깜짝 발표한 스페샬 앨범을 통해 이들의 실험과 도전이 계속될지, 여기서 멈출 것인지 답을 회피하고 있다. 하나 분명한 건 이 앨범이 갈림길 속의 고릴라즈의 운명에 대한 힌트가 될거란 사실이다. 또 한편으론 언제 어디서 이렇게 쉽고 다양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자 데이먼 알만의 의지와 도전 그리고 인맥을 생각해본다면 그게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하다. 앞선 내 세기말적 믿음이 그래도 아직까진 틀리진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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