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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준혁의 'Human Life'
    책|만화|음악 2011. 4. 2. 22:13

    도심을 걷다보면 언제나 마주치는 회색빛 콘크리트 마감에 묘한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복작거리는 차들과 차거운 네온등빛, 시끄러운 소음과 진동, 무관심, 그리고 정체불명의 오지랖과 빠르게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하는 나는 천상 도시 촌놈이다. 관심과 간섭을 피해 자신의 세계에 침전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감정을 휘발시키고 점점 더 시니컬하고 비관적인 시선을 갖게 되는 내 도시의 삶은 생존전략과 상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방패를 넘어 특유의 낭만을 선사한다. 각박하고 매마른 유리 동물원 속 거대 유기체처럼 돌아가는 미친 시스템. 크던 작던 액정으로만 나누는 대화. 우울한 자조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무기. 그리고 건조하고 단단해지는 만큼 강해지는 거라는 믿음까지. 줄곳 눈물과 감정을 지워버린 채 지구의 자전만큼이나 식상한 일상을 반복하며 비로소 살아있구나 자각하곤 했다. 이를 위한 BGM 정도는 생각해두는 게 기본. 박준혁의 두 번째 솔로 앨범 [Human Life]는 그런 모던하고 쏘~쿨한 시티라이프에 어울릴 법한 도심 진혼가다.
     
    홍대 인디씬에서 '멍밴드'로 활동한 이력과 네이버 이주의 음악에 뽑혔던 1집 'Private Echo'의 위용에도 불구하고 박준혁이란 이름 석자는 아직 대중들에겐 서먹한 존재감임은 분명하다. 더군다나 가느다랗게, 신경줄 거슬리듯 스산하게 다가오는 생경한 보이스 컬러 또한 꽤나 호불호가 갈릴 것 같고. 하지만 모든 곡을 작사/작곡하고, 연주하며, 녹음 및 믹싱을 진행한 원맨밴드로서의 다재다능한 솜씨와 추상적이고 세련된 우울함의 극대화를 보여주는 센스만큼은 참으로 만나기 힘든 아티스트임을 증명한다. 얼터너티브와 개러지 사이에서 부유하는 그의 독특한 감수성과 한없이 난해함 속으로 빠져드는 가사의 몽롱한 기운은 서로 상생의 효과를 발휘하며 예전 유앤미블루나 MOT의 노래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을 전달한다. 강렬한 첫인상은 아니지만 흐릿한 그 느낌이 가슴 한 편에 남아 자꾸 떠오르게 만드는 아련함이랄까. 그 마이너한 심상이 지배하는 현실감이 쟃빗 도심의 차갑고 건조한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한없이 침전되어가는 목소리로 읊조리는 상징적이고 모호한 가사 속의 너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런 너를 바라보는 나의 생각은 버려지는 착각일까 아니면 생기없는 감각인가. 추상화를 들여다보듯 알쏭달쏭한 화두를 던지는 '너, 그리다'는 기타와 엠비언트 사운드가 어우러진 슬로 템포의 곡. 그의 잿빛 색채감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도입부로 아주 잘 어울린다. 그 뒤를 이어 본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손색없는 시원스런 느낌의 'Control'이 명징한 기타 사운드와 함께 펼쳐진다. Some Eyes, Some Lies, Some Guys라는 운율을 살린 반복된 가사가 쉽게 따라부르게 될 만큼 인상적인 트랙. 두텁게 쌓이며 중첩되어가는 기타 소리가 스산하게 마음을 홀리게 한다. 세 번째 트랙에 자리잡고 있는 'Easy Life'는 모던하고 심플한 악기 편성만큼이나 인생에 대한 직설적인 소회가 담긴 가사로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인생은 정말 쉬운 걸까. 그 역설적인 감상들이 오히려 편안함을 부추긴다.
     
    공허한 사이키가 엠비언트를 만나 물가에 생성된 연무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안기는 '너, 닿다'는 소통에 대한 노래로, 짧은 가사 속 느릿한 호흡이 오히려 긴 잔상과 짙은 감동을 안긴다. 대중적이진 않지만 그 실험적인 시도를 눈여겨 볼 트랙이 아닌가 싶다. 통통 튀듯 경쾌하게 그 뒤를 받아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강아지'는 달달하고 충동적인 노랫말과 달리 점층적이고 반복적인 리듬을 통해 견고한 형식을 쌓아가는 재미가 느껴지는 곡. 우울함이 가득했던 지금까지의 보이스 컬러를 벗어던지고 나긋나긋한 고백과 쌉싸름한 위트가 감지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웃음'에선 푸른새벽의 한희정과 루싸이트 토끼의 조예진이 함께 했던 1집에서처럼 도나웨일의 유진영과 듀엣을 들려준다. 풋풋하지만 깨끗한 미성의 여자보컬과 꽤나 좋은 궁합을 보이는 그의 까끌한 사포같은 떨림은 이 동상이몽의 심정이 담긴 가사 속 바램처럼 아름답게 마무리 짓는다.

    현실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시니컬한 가사의 'Down'은 그 날선 독설과 달리 올드한 분위기의 블루지한 느낌을 맛깔나게 살린 곡이다. 마치 담배 5갑을 연달아 피고 부른 듯 탁하게 울려퍼지는 이펙트 먹인 보컬은 까칠한 노랫말에 더할 나위없이 잘 어울리고, 또한 낭만스런 연주와도 좋은 호흡을 이룬다. 느낌을 위해서라도 단 한 테이크로 녹음했어야 할 것 같은 노래! 피아노와 스트링이 옅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향'은 미니멀한 사운드가 따뜻한 봄날의 기운처럼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맥아리 없는 이승렬의 목소리를 듣는 듯 독특한 나른함을 안겨주는 박준혁의 보이스 컬러가 매력적이다. 탐탐(tom-tom)처럼 공간감을 각인시키는 드럼비트가 인상적인 'Simply'는 영어 가사의 슬로우 템포 곡. 조용한 발라드로 그냥 묻혀버릴 법한 노래를 독특한 편곡으로 부각시켰다.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Traum'는 경쾌한 미디엄 템포의 모던락. 타이틀곡 'Control'만큼이나 귀를 싹 잡아끄는 킬러 트랙인데, 그 분위기에 함몰되지 않고 역시나 씁쓸한 노랫말과 나른하기 짝이 없는 그의 음색으로 자신의 지장을 확실하게 남기고 있다.
     
    찌뿌드드한 현실의 피로함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그의 두 번째 앨범은 지극히 리얼하고 감성적이며 정중동의 에너지를 한아름 품는다. 나른한 듯 속삭이듯 조근조근한 그의 목소리는 강렬하고 파워풀한 락과는 분명 대비되지만, 내지르고 폭발하는 창법에는 존재하지 않는 긴장과 호소력이 숨겨져 있다. 드라이한 가사 속에서도 소박한 희망과 미래를 품어낸 그의 밝은 내일을 기대하고 응원해보련다. 좌절하고 투덜대고 움츠려도 내일은 조금 달라지겠지 그런 막연한 긍정의 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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