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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날로그 소년의 '행진'
    책|만화|음악 2010. 12. 27. 12:30

    누가 청춘이 아름답다 말하는가. 88만원 세대라는 신조어에 치여 취직이 일생일대의 목표가 되어버린 그들은 영어 점수에 목을 매고, 학자금 융자에 등골이 휘며, 이력서를 레포트보다 많이 쓴다. 독재와 맞서 싸우고 이념 논쟁에 한참이던 피끓는 청춘은 더 이상 없다. 축 늘어진 어깨, 밤낮이 바뀐 생활, 속의 마음을 가감없이 털어놓는 악플러, 좀약 냄새만 더욱 짙어진 한 번도 못 입어본 양복만이 그들의 현실을 증명할 뿐이다. 사랑도 돈 있어야 하고, 취직도 빽 있어야 하는 세상. 열정과 패기로 꿈만 꿔봤자 차라리 그 시간에 온라인 게임 레벨 올리는 편이 더 현실적이다. 낭만은 사라지고 지극히 차디찬 바람만이 부는 경쟁사회. 그 험한 취업란을 뚫고 입사해도 끊이질 않고 스펙을 요구하는 승진 대열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다. 타성에 젖은 채 오늘도 내일도 정각 9시에 시작하는 뉴스마냥 지겹도록 반복될 뿐이다. 이러기 위해 공부했나. 이러기 위해 사랑했나. 청춘은 그래서 오늘도 슬프다.
     
    청춘 힙합이라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이건 갱스터랩 저리가라의 공격성과 암울함이 하늘을 찌르겠구나. 이런 현실을 조장한 사회를 가감없이 비판하고, 저주하고, 욕하며, 아직도 쌈박질만 해대는 수구꼴통과 진보분열의 대립을 조롱하겠지. 게다가 게임, 인터넷, 성형 중독에 빠진 아이들의 모습은 또 어떻고. 정말 대찬 장르 하나 탄생하는구나 싶었는데, 왠걸. 우주히피, 좋아하서 하는 밴드, 아키버드, 시와 등 피쳐링한 그룹과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도저히 그런 파괴지왕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엉성한 폼새로 달려갈 듯한 자켓 이미지 또한 상큼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비둘기 날개를 잡아뜯어 뚝뚝 흐르는 핏줄기 위로 총과 주사기가 그려진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암울한 청춘에 기대고 있던 내 상상력이 너무 과했던 모양이다. 아날로그 소년은 그 이름만큼이나 올드한 정서, 즉 청춘은 열혈!에 포커스를 맞춰 젊음의 에너지를 발산할 기세다. 게다가 거의 모든 곡의 작곡과 프로듀스를 담당한 김박첼라의 입김도 무시 못할 부분. 인디언 팜에서 들려준 그의 범상치 않은 이질성이 생각난다. 멜로디를 강조한 훅과 장르에 연연해하지 않는 자유로운 스타일로 힙합의 경계를 탄 그였기에. 이번에도 그럼 설마?


    아니나 다를까. 강력한 킥과 드라이한 비트감이 질주하면 저멀리 환호성이 터진다. 그리고 슬며시 끼어드는 경쾌한 기타 루프와의 만남. 아니 이건 락이잖아? 첫 곡 '모여라'부터 힙합 특유의 외향적인 특색을 의심할 만큼 파격적인 퓨전성을 선보이는 아날로그 소년은 그 시도를 젊음이란 단어로 뻔뻔스레 해명하고 있다. 이는 김박첼라가 피쳐링한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친숙하고 심플한 멜로디의 훅(Hook)을 앞세우는 건 물론 청량감 넘치는 스네어와 인디락 사운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랩에서도 라임과 운율의 정형성을 벗어나 다소 헐겁지만 자유스러운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루브하고 파워풀한 힙합의 변신에 잠시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레게 스타일을 사알짝 접목시킨 세번째 트랙 '서울서울서울'에 이르러선 결국 인정하게 되고 만다. 독특하고 유쾌한 시도라는 걸. 게다가 상당히 시각화된 가사의 직접적인 느낌은 그간 형이상학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감정들을 나열하거나 알 수 없는 영어 단어들의 편린 그리고 의성/의태어들로 호소하던 대중가요 속의 카피 문구같던 가사들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일상다반사의 강자 윤종신의 랩버전이라면 오버일까.
     
    [슬램덩크] 속 기가 막힌 명대사를 고스란히 써먹는 낯간지러운 skit '락커룸, 5분전'을 넘어가면 드럼비트 위로 기타 프레이징이 명료한 밴드 사운드의 '마라톤'이 시작된다. 목표를 향해 달려야만 하는 젊은 세대들을 위한 일종의 위로송이라 할까. 계속 달리겠다는 의지 속에 치열하면서도 안식을 바라는 씁쓸함이 살짝 묻어난다. 나른한 기타만큼이나 나긋나긋한 우주히피의 피쳐링이 두드러지는 '내 세상' 역시 전곡과 동일하게 젊음에 대해 구구절절 토로한다. 간주에 흐르는 하모니카 선율만이 그 도전 속에 생긴 생채기를 어루만져 주듯 섬세하게 다가간다. 코나 2집의 대표곡 제목을 떠올리게 만드는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뜨겁다'는 안복진의 아코디언이 전면에 나선다. 남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보사노바풍 사운드만큼 젊음의 열정에 대해 잘 표현할 수 있는 장르가 또 어디 있을까. 복진의 불투명한 듯 무관심한 듯 쉬크한 보이스컬러가 아이러니하게도 잘 어울린다. 이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어 나가는 '안녕 윌슨' 역시 조금 빠르지만 달콤하고도 감각적인 곡. 영화 [캐스터 어웨이]의 상황을 매일매일의 젊음에 대입해 지겨운 일상다반사를 표현하는 재미가 깨알같다. 아키버드의 보컬 유연의 편안한 스캣과 어우러지는 흥겨운 기타 사운드가 일품!


    이사가기 전날의 분주함을 담은 시츄에이션의 skit 'D-1'이 지나가면 그 반주 그대로 '이사가는 날'이 시작된다. 사랑의 추억도, 가난의 기억도, 꿈만이 가득 채우던 그 희망의 시간도 모두 젊음이라는 필터에 거쳐 아름답게 정화된다. 그래서 그 회한을 곱씹어보던 아날로그 소년의 랩도, 덤덤히도 그려내는 시와의 보컬도 조금은 애잔하게 들린다. 이 기분을 조금은 날려버릴 양 낭만적이고 따뜻한 사운드의 '자전거 일기'. 모 이온 음료 선전에 나올 만큼은 아니지만 기분좋게 페달을 밟고 싶게 만드는 전염성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록'. 본 앨범에서 가장 자조적이고 피폐한 현실을 담아낸다. 벽에 부딪친, 날개가 꺾인 그리고 주류로 편입하지 못한 삶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공포심이 어우러져 청춘의 다크한 이면을 그린다. 마지막 트랙을 장식하는 건 블루지한 스타일의 '계획엔 없어요'. 떠나갈지도 모르는 불안한 사랑에 대해 읊조리는 감정들이 앨범의 대미를 장식한 게 조금은 아쉽긴 하지만, 어찌보면 이게 가장 젊은이들이 갈구하고 봉착한 화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초반부의 치기 어린 패기와 열정이 다소 옅어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두 개의 skit을 기준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흥겹고 경쾌한 분위기의 모여라/기쁜 우리 젊은 날/서울서울서울, 조금은 진지한 화두를 던지는 세련된 리듬의 마라톤/내 세상/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뜨겁다/안녕, 윌슨, 그리고 불안한 이면을 애써 감추거나 드러내는 무거운 감정의 이사하는 날/자전거 일기/기록/계획엔 없어요 까지. 신선하고 재미있는 시도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힙합만의 고유한 비판정신과 스타일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다양한 콜라보를 통해 변신해야 하나 싶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허나 인생엔 정답은 없으니... 즐겁게 청춘을 듣고 맛보고 즐기면 그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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