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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즈키 츠네키치의 '물고기 비늘'
    책|만화|음악 2012. 10. 4. 06:52

    칠팔월의 맹렬한 더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감돈다. 짧은 팔만 입고 나서기엔 제법 날이 차가워졌다. 아직까지 더운 기운이 모두 가신 건 아니지만 슬슬 주위를 돌아보며 운치를 찾는 그런 날이 되어간다. 은은한 풀벌레 소리와 하나 둘 떨어지는 가로수 이파리들, 짧아져 가는 낮의 길이. 그 변화에 맞춰 듣던 음악마저 변한다. 깡총깡총 방정맞게 뛰며 세계를 휩쓸던 싸이 스타일의 댄스곡과 길쭉길쭉 시원하고 아찔한 남녀 아이돌 음악이 플레이어에 가득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올 여름은 더 더웠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몸과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힐 여유와 사유가 필요하다. 짜릿한 감각과 여흥은 잠시 접어두고 다가오는 계절에 맞춰 침전과 우수를 택했다. 손에 들린 건 스즈키 츠네키치 鈴木常吉였다. 이름만으로 모른다면 일드 [심야식당] 주제가를 부른 그 사내다. 목소리에 삶의 더께가 낀, 까끌하니 텁텁한 인상으로 비애와 권태를 담담하게 노래하던 그다.

    츠네키치의 보컬은 세련됨과 거리가 멀다. 감미롭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서늘하니 무뚜뚝하고, 웅얼거리듯 읊조린다. 조금 높은 음엔 여지없이 갈라지고 가녀리게 떨린다. 훈련소 화장실에서 라이터로 켜고 읽던 편지처럼 처량맞고, 첫사랑에 실패하고 돌아서던 발걸음만큼 더디다. 애수가 도는 단조로운 기타와 향수를 자극하는 아코디온, 베이스처럼 깔리는 튜바, 그리고 소소한 감정을 달래주던 클라리넷과 알토 섹소폰의 따뜻한 감성의 반주가 이 음울함을, 차분함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럼에도 끌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건 단순히 서늘해진 계절 탓만은 아닐 것이다. 포크와 블루스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본류를 별다른 수사(修辭)없이 들려주는 진정성이 무엇보다 먼저 다가와서다. 수사가 없다는 건 중요하다. 그는 노래의 여백을 따로 채울 필요가 없다. 그 목소리에 담긴 정서가 모든 걸 꾸며주고 있기에, 소박하고 정갈하니 꾸며진 차림상 속에 두터운 휴머니즘과 풍성한 화성, 희노애락의 모든 드라마를 품었다.

    데뷔한지 17년이 지난 2006년 느즈막이 발표한 스즈키 츠네키치의 솔로앨범 [물고기 비늘]에는 총 14곡 63분에 이르는 사내의 씁쓸하고 관조적인 궤적이 실려있다. 세대를 나누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하나같이 어른의 노래에, 사변적이고, 짙은 여운과 회한을 남기는 곡들이다. 시간이 지나봐야만이 알 수 있는 그런 느낌들의. 처연하니 아날로그의 맛을 잔뜩 안겨주는 첫 곡 '역병의 신 厄病の神'부터 그의 음악이 어떤 색채인지 극명하니 드러낸다. 그러나 단순한 비애와 좌절은 아니다. 고질적인 인생의 암(暗)과 상처에서 극복하고픈 기원을 담아낸 한줄기 희망과도 같은 그만의 주술이다. 뒤를 잇는 '아이오 야곡 アイオ-夜曲' 역시 담백한 포크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일본 특유의 지방색을 느낄 수 있는 싸비가 인상적이다. '상수리 나무 くぬぎ'에 이르러선 분위기를 바꿔 30년대 블루지한 기운을 담은 동요스런 악곡의 노래를 선사한다. 일상적인 스케치에 담담한 상념을 녹여낸 소박한 가사와 의뭉스러운 보컬이 잘 어우러져 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붉은 수염 アカヒゲ'의 아코디온은 마치 우크라이나 민속음악을 듣듯 한없이 애잔하다. 거기에 어우러지는 츠네키치의 중년의 목소리에선 인생의 답을 반쯤 알아버린 노련한 수컷 너구리의 회한과 비애가 묻어난다. 담백하지만 강렬한 노래에 가사의 무게가 중화된다. 조지 거쉬인의 스탠다드 넘버 '서머타임 サマ-タイム'도 그의 손을 거치면 미묘하게 변화한다.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와 보컬리스트들이 부른 감정과 끈적함은 희석돼 사라지고 그만의 자장가가 되어 후대의 아이들에게 넌지시 충고한다. 희망이 있으니 울지말라고. 그리고 그건 그 뒤를 잇는 '워리 블루스 ワ-リ-•ブル-ス'와도 맞닿아 있다. 사는 건 부엌이나 침실이나 어디든 다 그래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이 노래는 체념적이지만 묘하게도 슬프지 않다. 그의 깊은 목소리에 담긴 평화스런 정의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일본 전통민요에 가까운 '눈을 뜨다 目が覺めた'는 유치하면서도 적나라한 감정이 담긴 가사까지 상승 작용을 하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삶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심도 깊은 가사와 흥겹고도 슬픈 민속음악적인 가락의 '돌 石'은 앞선 '붉은 수염'과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보다 행진곡 풍의 연주와 선동조의 보컬이 어우러져 돌처럼 굳센 심지와 단단한 감정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다시 포크 사운드로 회귀하는 '덤불 藪'은 사색적인 가사와 서정적인 기타, 음울하지만 포근한 클라리넷이 어우러진 회색 안개와 같은 노래. 뒤틀리지만 보듬길 멈추지 않는 그의 보이스가 불안을 잠식하고 영혼을 위로한다.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다가오는 또다른 포크송 '미노군 ミノ君'은 시각적인 질감과 일상의 묘한 리듬감이 만나 편안한 감동과 소소한 재미를 안겨주는 곡이다. 금연을 강조하는 요새 세태와 달리 '담배를 피워라 煙草のめのめ'란 자극적인 타이틀을 단 11번째 트랙은 제목과 달리 담배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담담히 풀어낸 곡이다. 허무하지만 그런 게 인생이지 달관한 듯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가 인생사 두려움을 연기처럼 날려버린다.

    유년기에 대한 뛰어난 묘사를 보인 바 있는 시어도어 로스케의 시에 곡을 붙인 '아버지의 왈츠 父のワルツ'는 취한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을 통해 피폐해진 어른의 삶과 인생의 무게에 대해 설명한다. 아코디언이 가진 향수와 섹소폰의 애수, 거기에 왈츠의 리듬감과 아이의 마음을 담은 듯 천연덕스럽게 부르는 츠네키치의 목소리까지 결합돼 복합적인 감성을 갖는다. 그 뒤를 잇는 건 이 앨범에서 가장 유명한 그 곡, [심야식당]의 오프닝곡으로 쓰인 '추억 思ひで'이다. 드라마를 보며 그렇게 많이 들었지만 원곡이 아일랜드 민요 'Pretty Girl Milking Her Cow'라는 건 전혀 몰랐다. 리코더의 맑은 소리와 그의 잠긴 듯 떨려오는 목소리가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곱씹게 만든다. 추억은 그러고보니 구름같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역시 잘 알려진 아일랜드 민요 'Carolan's Cup'에 가사를 입힌 '밥공기 お茶碗'다. 특이한 건 모든 연주가 끝나고 나서 무반주로 짧게 노래를 부르고 기침으로 마무리 짓는다는 거다. 삶은 먹는 걸로 이어가고 기침은 또다른 시작을 알린다는 의미처럼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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