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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라카미 하루키의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책|만화|음악 2012. 7. 23. 03:31


    하루키의 에세이를 처음 읽게 된 건 그의 소설이 모두 대출되고 없는 대학교 도서관 덕분이었다. 지금은 격하게 고맙게 여기고 있지만 당시 나는 그의 책을 읽기 위해 열이 올랐던 때라 야속하리만치 텅 빈 책장을 바라보는 게 꽤나 고역이었다. 같은 무라카미라도 류씨의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대신 빌릴 걸 물색하던 중 눈에 들어온 게 바로 하루키의 에세이였는데, 딱 봐도 재미없을 것 같던 문학사상사 특유의 촌빨 날리는 표지에, 너덜너덜 다 떨어진 것 같은 책 상태, 거기에 다섯 살 먹은 아이가 그린 것 같은 안자이 씨의 유치찬란한 일러스트까지 결합돼 딱히 빌리고 싶단 마음은 들지 않았다. 편당 글이 짧은 것 같으니 그냥 한 번 들춰나 볼까 싶은 마음으로 가볍게 선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10분 뒤 내 손엔 그의 모든 에세이가 들린 채 대출대로 가고 있었다. 그게 하루키 에세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여성처럼 투명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정갈하고 담백한 묘사를 하며 두근거리고 때론 절망적이며, 엉뚱한 데다가 난해하기까지 한 이야기들을 뜬금없이 툭 던져놓는 소설 속의 쉬크한 하루키와 달리, 에세이에서의 그는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상사들을 소시민적인 아저씨의 고집(?)스럽고도 삐딱한 시선으로 두런두런 부담없이 늘어놓는다. 예리하면서도 두리뭉실한 그 소소한 잡담들은 이혜인 수녀님만큼의 딱히 깊은 감동과 만물박사스런 이규태 코너만큼의 폭넓은 깨달음, 피천득 선생님의 빅! 재미와 울림을 전달하진 않지만, 그런 느낌과는 또 다르게 입가에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것도 아주 참기름을 발라놓은 것처럼 술술술. 꺼끌거리면서도 쿨하던 소설 속 무심하던 글발은 어디로 갔는지 감쳐놓고서 이런 무방비하고 털털한 수다를 늘어놓는 그의 모습에 요술봉을 휘둘러 변신하는 소녀만화 속 주인공을 떠올렸다. 하루키도 분명 에세이용 요술봉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변신 전 변신 후 만큼이나 다른 글을 가지고 있다. 자신도 그걸 아는지(물론 알겠지. 마술봉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알 것이다!) 맥주와 우롱차에 대한 비교를 들었다.


    [무라카미 라디오] 2탄으로 십년만에 나온 [채소의 기분, 바다 표범의 키스]는 그 엉뚱하고 유쾌한 제목만큼이나 잡다하고 자조적이며 그래서 귀엽고, 나름 반전과 위트를 지닌 완성도에, 편안한 일상적인 글들로 짧지만 강력한 한방을 지닌 하루키만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에세이다. 안타깝게도 그 감성과 너무도 잘 맞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는 없지만(앞서 5살짜리 아이가 그려놓은 것 같다고 했지만, 정말 하루키 에세이와는 찰떡궁합이다! 그 유치하면서도 키치적인 미학은 자꾸 보다보면 사로잡히고 만다!), 대신 전작 번역본에선 빠져있었던 오하시 아유미의 심플하면서도 기묘한 아름다움의 동판화가 실려있다. 게다가 본문이 긑날 때마다 깨알같이 밑에 적혀있는 한 줄의 코멘트는 어찌나 픽픽 웃겨 만드는지.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노르웨이에서는 하반신을 들어낸 마네킹을 쇼윈도에서 자주 봅니다. 어째서일까요?', '일본에서는 던킨 도넛이 사업을 철수하고 긴 세월이 흘렀다. 국가적 비극이다' 등등. 본문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그 독특한 화학작용이 하루키의 에세이를 더욱 강화시킨다. 이런 식으로 일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조금은 삶이 덜 피로해지지는 않을까.

    모두 50편의 짧은 글들이 200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에 실려있으니 맘만 먹으면 한 번에 앉은 자리에서 싹 다 읽을수도 있지만, 일부로 조금씩 아껴 읽었다. 이건 예전 하루키 에세이를 처음 읽었을 때 깨우친 나만의 노하우다. 비가 마구마구 내려 기분이 우울할 때, 더위에 지쳐 짜증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올랐을 때, 하던 일이 안돼 조금은 다운되고 지칠 때. 기타등등의 여러 사유들로 화가 나고 속상할 때 삶의 자양강장제로 그의 토막글들을 복용했다. 약효가 즉효인 명약처럼 딱 낳았다! 기분이 풀어졌다! 쉽게 말할 순 없지만, 신기하게도 하루키의 밍숭맹숭 담백한 감질맛이 느껴지는 일상 수다는 조금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선을 달리 조절해주는 것 같다. 여유랄지. 기백이랄지. 포기인지, 독백인지 헷갈리는 그런 묘한 구석의. 내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형질의 요소인지라 암튼 하루키의 에세이는 도움이 된다. 약효는 잘 모르겠지만 기분학상 좋은 까스활명수처럼. 짧은 분량이 많이 아쉽지만 아직도 [앙앙]에서 연재되고 있다고 하니 조만간에 무라카미 라디오 3탄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까지 채소에게도 다 각기 사정이 있는 거고, 바다 표범의 키스는 비리다는 거, 절대 잊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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