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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츠키 히로유키의 '타력'
    책|만화|음악 2012. 8. 6. 20:21


    타력이라니. 내가 생각한 그 뜻이 과연 맞을까. 처음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제목의 생경스러움과 의아함이었다. 초딩 시절부터 바른생활 시간에 스스로 알아서 척척척! 이란 생활 모티브를 구호처럼 되뇌던 학교 선생님 밑에서 수업을 주구장창 세뇌되다시피 받아오던 범생 출신인지라 아무래도 이런 정반대되는 주장이 이태리 타올 만큼이나 더 까끌까끌하게 다가왔다. 자력으로 씩씩하고 열심히 바리바리 살아도 모자랄 판에 남의 힘을 인지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참으로 수동적인 태도라니, 신선하고 독특하게 느껴지지만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혹시나 인생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노하우나 일상의 지혜라도 담아낸 실용서라면 좀 다르겠지 싶어 한두 장을 넘겨보니 그와 달리 불교적인 시각이 옅게 배인 삶에 대한 진중한 에세이였다. 짧지만 자신만의 시각이 뚜렷이 담긴, 인생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힌트이자 메모에 가까웠다. 하긴 이 오지랖 넓은 세상에서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터,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격랑의 삶을 거쳐 온 지은이로선 알게 모르게 작용해온 불가항력적이고 거대한 시류의 힘의 존재를 무수히 많이 보고 느끼고 경험해왔을 것이다.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부대끼고 싸우고 사는 인간이기에 자력을 넘어서 발휘되는, 그 모종의 객관적으로 견지하기 어려운 ‘타력’에 대해 이츠키 히로유키는 덤덤히 겸허한 마음으로 이야기해나간다.


    거창하면서도 강경해 보이는 제목과 달리, 지은이가 바라보는 삶은 되려 단순하고 간단하다. 체념적이고 부정적이며 수동적이기까지 한 타력의 삶은, 그러나 이율배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돌려 삶에 대한 적응력과 자세를 굳건하게 만든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에서도 지적한 바 있듯이 막연한 긍정과 적극적인 자세가 가지고 있는 맹점과 위험성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서 균형과 안정을 꿰하는 효과적인 완충장치를 마련하는 셈이다. 허나 애런라이크의 철저히 사회적이고 경제학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의견과 달리 이츠키 히로유키는 불교의 물음과 잠언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세상을 바라본다. 명확하고 객관적인 이론적 토대는 아니지만 그 종교적이고 사색적인 시선에서 발생하는 명상적인 요소는 깊은 깨달음과 성찰의 기회를 안긴다. 모든 것은 하나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 최선을 다하는 자력의 효과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이외 배경이 되는 세상 자체를 인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지은이는 새삼 명시시킨다. 진인사대천명과 타력본원, 나무아미타불 등과 같은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말들을 통해 진실한 나 이외의 모호한 힘의 근원을 설명하는 지점은 조금은 어렵고 지루하며 또한 종교적으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삶에 대한 태도와 자세를 지적하는 섬세한 충고로 막연히 수동적이고 네가티브한 삶을 살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타력’이란 강력하고 진취적으로 작용하는 힘이 아닌, 그 존재감만으로 인정하고 숙이게 만드는 겸손한 삶의 태도인 것이다. 


    총 100장으로 이뤄진 책의 본문에서는 짧지만 함축적인 타력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다양한 주제들을 펼쳐놓는다. ‘안 되는 건 안 된다’라고 생각해라, 진정한 플러스 사고는 궁극의 마이너스 사고에서, 살아있는 인간은 모두 병자이다, 자살과 타살은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 깊이 슬퍼하는 사람일수록 크게 기뻐할 수 있다, 이단의 요염한 빛은 정통을 비춘다, 지독한 번민에서부터 진정한 확신이 생긴다, 상식에 맞지 않는 것을 소중히 한다,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등과 같은 반어적이고 독설적인 화두에서부터 출발점은 나를 믿고 사랑하는 것, 남의 모범은 될 수 없지만 견본은 될 수 있다, 마음에 남는 것은 잊히지 않는다, 둘이서 기뻐하면 기쁨이 배가 된다, 중요한 것이 무시되어 왔다, ‘슬픔’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 등과 같은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문제, 그리고 오늘이 최후의 날이 될 거야, 인생은 스스로 내던질 만큼 지독하지 않다, 욕망과 번뇌에서 자력으로 해탈할 수는 없다, 지금 무상의 바람이 불고 있다와 같은 철학적이고 심오한 정신세계와 민감한 감성 등을 건드리는 그의 간결한 조언들과 아프지만 확실한 체험담 그리고 롄뇨라는 인물을 통한 비유들은 나약해져만 가는 정신과 피폐해진 마음에 시원한 냉수마찰을 마구마구 해댄다. 멘붕이 트렌드가 된 시대에 어쩌면 가장 효과적인 충고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타력’은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동기를 피력한다. '의지'가 어이없게 모그룹에 의해 남용되는 現시류가 참 아쉬운 일이지만서도.

    끝으로 마츠나가 고이치가 해설에 쓴 문장을 덧붙인다. 이보다 더 이 책에 대해 잘 나타낸 말은 없을 듯 싶다. "사상이란 몸에 스며드는 것처럼 친근하게 이야기될 때 비로소 타자의 토양에서 싹을 틔운다. 이 [타력]은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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