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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e Young의 '4 Luv'
    책|만화|음악 2012. 5. 28. 15:04


    조금은 덥다 싶은 봄날, 희영의 정규 1집이 나왔다. 작년 이맘때 처음 발표한 EP를 들으며 파스텔 뮤직에 잘 어울리는 여성 싱어송라이터구나 감탄했던 기억이 선한데, 훌쩍 시간이 지나 그녀의 새 노래들을 CDP에 걸어놓고 산들거리는 봄기운을 맞으며 듣고 있으려니 그 지난 음音의 감촉들이, 그 상찬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국내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아메리칸 포크팝 스타일의 음악이었다. 빈티지스럽지만 세련되고,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시도와 의식은 없지만, 편안하고 살짝은 애잔하기까지 한 그런 기운의 감성이었다. 장르적으로 어렵고 생소하기 때문에 듣기 힘든 게 아니라, 이런 음악들을 소비할 대상에 대한 시장의 섣부른 판단과 이런 색깔을 유지해선 버틸 수 없는 풍토에 대한 가수들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부재였기에, 이 앨범이 더할 나위없이 반가웠다. 국내에 머물면서 주활동을 펼치지 않았기에 오히려 가능했던 노래들이다. 트렌드와 시간에서 살짝 빗겨난 그 복고지향적인 매력이 짙은 커피향처럼 오래오래 남아 흐른다.

    앨범 디자인부터 60-70년대 포크팝 자켓을 연상케한다. 갈대밭에 앉은 히피스타일의 의상과 흘림체의 타이포그라피, LP를 떠올리게 하는 디지팩과 CD 디자인까지. 의도적이다. 수록곡 면면 또한 그런 색채에 걸맞게 충실하기에 그 통일된 감성이 던져주는 묘한 기시감의 카타르시스가 설레게 만든다. 원체 포크라는 장르 자체가 익숙한 정서적 유대감으로 교감하기 마련인지라 그녀 노래들이 아주 새롭고 독특하진 않지만, 짜임새 있는 곡 메이킹과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으면서도 결코 끝까지 추락하지 않는 '희망적인 우울함'이 던져주는 감동은 퍽 쏠쏠하다. 가녀린 듯 하면서 허스키하고 때론 달달하며 멜랑꼴리한 4색 보이스를 지닌 그녀의 보이스톤도 좋고, 20대답지 않게 이 곰삭은 장르를 노련하게 조율하는 실력 또한 놀랍다. 단지 조금 아쉬운 건 한국어 가사도, 발음도 좋은 편인데 굳이 영어로 된 가사와 노래를 고집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점 정도. 지나도 에일리도, 그리고 그 많은 재미교포 출신 아이돌들도 어눌하고 익숙치않은 발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려 노력하는데, 되려 이 감정을 이방인의 시점으로 그들의 언어로 담아낸 그녀의 의도가 조금은 궁금하게 느껴진다.


    시작은 앨범과 동명의 제목인 '4 Luv'가 맡고 있다. 살짝 안개 먹은 듯 담백한 보이스로 아쉬운 사랑에 대해 반추하는 이 포크송은 잔잔한 기타 선율에 덧입혀진 피아노와 드럼이 친숙하게 다가오는 브루클린발發 애련의 초상이다. 뉴욕 시티를 떠올리게 하는 재기발랄한 제목의 'Knew Your City'는 그 위트와 달리 진중하고 아련함이 느껴지는 노래다. 이펙트가 걸려 서정적이고 아련한 기운을 느껴지게 만드는 이 곡은 그녀가 타지에서 느낀 고독의 심상이 고스란히 반영돼있다. 그 뒤를 잇는 건 70년대 포크 사운드를 듣는 듯한 복고적인 감수성의 'Buy Myself A Goodbye'. 상념이랄까. 아쉬움이랄까. 그 아릿한 마음이 손에 잡힐 느껴져 감정을 다시금 추스리게 한다. 봄날보단 가을에 걸맞는 사운드. 앨범에서 첫 번째 한국어 가사를 들려주는 'Lonely like Everyone'는 밝고 사랑스런 기운 속에 숨겨진 외로움과 슬픔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희영의 스타일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곡으로 슬프지만 희망차고, 애절하면서도 밝은 이중성이 빛을 발한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Big Knot' 역시 한국어 가사를 가진 노래로 잔잔하게 읊조리는 그녀의 보이스에 하나 둘 덧입혀지는 피아노와 스트링, 드럼 그리고 브라스섹션의 뒷받침이 매력적이다.

    침전되는 기운이 나른하게 퍼저가는 'Fly Lo Fly Hi'는 봄날의 짧은 졸음과 같은 노래다. 바람에 실려 유유자적 부유하는 꽃가루처럼 은은하게 마음을 뒤흔드는 서정 속 숨겨진 회한의 그림자는 여운을 짙게 남긴다. 그간 앞선 곡들과 달리 도입부부터 불안한 기운과 다크한 톤이 다분히 감지되는 'Sadly Mason'는 단조로운 서두와 달리 중반 이후 포크락으로 선회해 아름답고 애잔한 후렴구를 선사한다. 그 뒤로 이어지는 'Let Me In'은 블루지한 기운을 가득 품은 기타 사운드가 일품인 곡으로, 우울하고 슬프면서도 그 끝으로 가라앉지 않는 특유의 부유감이 느껴지는 포크락이다. 늦봄에, 다가오는 초여름에 바라보는 겨울길은 어떤 의미일까. 'Winter Road'는 오버더빙된 희영의 보이스가 포근하고 두텁게 깔리는 가운데, 스트링과 기타의 미세한 떨림이 그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겨울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포착해내고 있다. 마치 그녀 노래가 갖는 이중성을 대변하는 트랙과도 같다. 11, 12, 13 트랙이 앞선 노래들의 영어, 한국어 버전임을 볼 때 실질적으로 마지막 트랙인 'Call Your Name'은 두텁게 깔리는 중저음의 남성 코러스와 그녀의 보이스 컬러가 독특하게 조화를 이루는, 경건하면서도 스산한 기운의 흑인영가풍 노래다. 끝인 듯 아닌듯 맺는 여운이 짙게 가슴을 두드린다.


    갑작스레 높아진 기온에 조금은 덥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잃어버린 계절을 온전하게 찾아주는 - 조금은 춥고도 약간은 따뜻한 - 봄날 같은 느낌을 가진 그녀의 노래가 반갑다. 갸날프고 애잔하지만 그런 기운을 애써 숨기지 않는, 가식없는 씩씩함과 소박스런 담백함이 좋다. 다양성이라곤 갈수록 척박해지는 가요 풍토에 이런 잔잔한 봄비 같은 사운드로 촉촉히 젖셔주기를. 어디 물들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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