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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척 드리스켈의 '그레타의 일기'
    책|만화|음악 2016. 5. 31. 02:57

    척 드리스켈의 [그레타의 일기]는 자뭇 흥미로운 설정으로 시작한다. 히틀러에게 알려지지 않은 유태인 정부가 있었고, 그녀가 히틀러의 유태인 사생아를 낳았다는 기록이 담긴 일기가 발견된다는 것.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진짜라면 그 기록에 대한 관심사와 그 핏줄에 대한 관심사가 폭발적으로 쏟아질 건 자명한 사실. 일기를 발견한 우리의 주인공 게이지 하트라인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때마침 그의 주변에선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유전공학을 활용해 맹글러 박사의 야욕을 다뤄 충격을 주었던 아이라 레빈의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나 역시 나치즘의 끔찍한 미래를 세팅해 반전의 묘미를 주었던 앨런 폴섬의 [모레]처럼 이 소설 역시 충격적이고 전복적인 세팅으로 독자들의 구미를 확 끌어 당기는데 성공한다. 게이지 하트라인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동시에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이런 흥미로운 설정을 두고 게이지 하트라인이라는 전직 특수부대원을 등장시켜 썩 읽을 만한 스릴러를 완성시켰다. 물론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독자들을 당황시키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우직하니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소설은 전직 군인 출신의 이력을 가진 작가답게 스트레이트하고 확실하다.

    문제는 이 기가 막힌 설정을 플롯에 제대로 녹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치 녹는 점이 다른 물체들을 마구 섞어놓은 것처럼 따로 따로 도는 감도 없지 않다. 히틀러가 사생아를 가졌다는 놀라운 설정임에도 주요 악당인 니키는 新나치 열혈 숭배자도 아니고, 舊나치 잔당의 후예도 아니고, 심지어 독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악질의 프랑스 갱단 두목일 뿐이다. 다른 세력으로 주인공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장 제노아 역시 프랑스인. 독일은 그저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배경으로만 활용된다. 팩션에 가까운 야사나 가상 역사의 설정이 일기에서 넌지시 암시되며 현재 유럽연합 상황과 결부된 거대한 무언가의 세력이 등장해 음모를 꾸밀 것이라고 기대하고 상상했다면 큰 오산. 그런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착상을 비웃기나 한 것처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일기를 조사해나가던 중 싸이코패스에 가까운 갱단의 우연치 않은 방해로 주인공은 여자친구를 잃게 되고, 그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그동안 봉인해두었던 살상용 전투머신으로서 본성을 깨우치고 충실히 보복의 무서움을 전달하는데 혈안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그레타의 일기'는 다소 뒷전이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후반부는 복수담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짙다. 가끔 일기를 들춰보며 히틀러의 색다른 모습을 언급하고, 그레타의 심리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복수에 지장을 끼칠 수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건 이 소설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게이지 하트라인이라는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생생한 묘사와 구축에 있다. 독일에서 오랜 기간 근무를 했던 전직 군인 출신이라는 이력이 더해져 생생한 독일에 대한 묘사와 체험이 담긴 노하우라고 해도 무방한 지식과 생동감 넘치는 전투 묘사는 피를 끓게 만드는 무언가가 숨어있다. 조금은 잔혹하다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진행되는 복수담은 과도한 폭력 수위로 인해 눈살이 찌푸려지도 하지만, 복수담이라는 내용에 걸맞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해당하는 카타르시스와 만족감을 안긴다. "복수는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 같다"는 클링곤의 속담에 딱 해당할 것 같은 과묵하고 행동감 절정의 게이지 하트라인은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가득 안은 사내다. 테스토스테론이 아프리카 축구장에서 울려퍼지는 부부젤라 소리만큼이나 마구 분출되는 그의 카리스마는 과거 80년대 하드 바디로서 인기를 끌었던 액션스타들이 나오던 첩보물 같은 매력을 담고 있다. 다소 유약하고 감성적이며 우유부단한 모던 스릴러에 질렸다면 묵묵히 결말을 향해 내딛는 [그레타의 일기]는 또 다른 대안을 안겨줄 수 있을 듯 하다.

    표지 오른쪽 구석에 박힌 조그마한 로고로 봐선 이 작품을 필두로 다른 게이지 하트라인 시리즈도 소개되지 않을까 싶은데, 리 차일드나 빈스 플린의 스릴러들처럼 알음알음 알려졌으면 싶다. 가슴 아픈 그의 과거에 대해 살짝 언급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곳을 비워둔 게이지 하트라인이란 인물이 일당백 전투력 만땅으로 다른 악당들도 시원스레 확 쓸어버릴 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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