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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림의 '나무대륙기'
    책|만화|음악 2016. 3. 9. 18:30

    가볍고 말랑말랑한 판타지 로맨스를 예상했다가 내심 당황했다. 은림의 [나무대륙기]는 생각보다 장대하고 복합적인 상징과 은유를 갖춘 의미심장한 텍스트였다. 게다가 심지어 많이 어둡고 먹먹해서 로맨스의 무게는 쉬 휘발되고 다크 초콜릿처럼 깊고 짙은 풍취와 쌉싸름한 맛만 남아 여운을 증폭시켰다. 동양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낯선 세계관과 이인종들의 배치도 다소 생경한 편이었는데, 이를 소개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예의 전통적인 컨벤션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서미’ 공주와 시녀 ‘무화’의 뒤바뀐 신분에 대한 소소한 비밀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나무대륙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에 대한 거대한 비밀로 확장되는데, 캐릭터 저마다 갖고 있는 사연과 운명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히고설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망해내고, 세계수와 같은 한편의 신화로 완성된다. 명쾌하게 줄거리를 딱히 하나로 정리하기 힘든 다층적이고 모호한 요소를 갖고 있지만, 두 소녀의 사랑과 우애, 시기와 질투를 다루는 섬세한 심리와 풍부한 감정 묘사가 소설의 중심축을 잡고 이끌어간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현재와 과거, 화자의 시점과 의식이 혼용돼 구사되는 서사다. 다음 장을 넘겨도 이전 장의 상황이 다른 시점으로 겹쳐져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장과 장뿐만 아니라 단락 안에서도 두 여성 캐릭터들 간의 기억과 상황, 시점이 넘나들며 반복돼 독자들에게 혼란스러움을 안기는데, 이는 초반의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중반을 넘겨 결말부에 이르면 비로소 그 층위가 읽히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낳는데, 두 인물들 간의 결속과 반발, 유사와 대립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이런 관점과 내면의 변화를 활용한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수려하면서도 까끌까끌한 문체 또한 인상적이다. 이른바 대여점 문고로서 폭발적인 수요를 자랑했던 한국형 판타지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기라도 하듯 가볍고 상투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곱게 씹어 삼켜야 의미가 안에 꽃을 피우는 은림의 문장은 천천히 음미하며 받아들여야 했다. 중간 중간 화자가 모호해지며 누구의 내면인지 알기 위해 집중하게 만드는 한편, 생경한 개념과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기 위해 한 발짝 떨어뜨리게 만드는 역할도 했다. 그래서 굉장히 빨리 읽는 편이라 자부했음에도 이 소설만큼은 천천히 거리 두며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아닌 ‘여자’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의 이야기들을 계속 해보겠다는 작가의 말처럼 험난한 여정을 겪고 가혹한 운명을 맞는, 이 소설 속의 여성 캐릭터들에 대해 작가가 설정한 부분들도 눈여겨 볼만 하다. 대다수 판타지나 로맨스 소설에서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그려지는 여성과 달리 이 소설 속에서 ‘서미’와 ‘무화’는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 부딪치고 투쟁하는데, 그 방식이 서로 다르면서도 결국 유사해진다는 것이 흥미롭다. 판타지 로맨스에서는 보기 힘들게 ‘무화’는 동녀로 홍등가에 팔려간 과거를 가지고, 왼팔을 정상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며, 때론 남장을 통해 성정체성을 모호하게 흐리고 있으며, ‘서미’는 공주로서 입궐을 압두고 귀족들과 왕족들에게 선보이고 전시되며 정경의 수작으로 흥정(?)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는다. 이보다 앞선 ‘녹옥공주’ 또한 이러한 시련과 한번 좌절된 쓰린 상처를 지녔을 거라 추측되고, ‘클로버’나 ‘아몬드’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다. 여전히 세월이 변해도 비슷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의 씁쓰름한 상황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잔혹한 전설에 대한 기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제2인류로 살아온 여성의 억압되고 (유흥으로) 소비되며 정체된 삶을 담아내는 동시에 그와 다른 길을 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캐릭터들을 통해 조금은 변화된 사회를 바라는 작가의 바램을 읽을 수 있었다.

    아쉬운 건 조금은 급하게 마무리된 것처럼 보이는 후반부다. 훨씬 더 나무대륙에 대한 전사와 세계수에 관한 미래를 풀어줄 수 있는 단서와 인물을 가졌음에도 서둘러 휘몰아쳤다. 오랜 기간 구상하고 담아왔던 이야기답게 가진 재료와 주제가 명확하고 장대한 세계관과 인물들도 생생했기에 풀어서 매만졌으면 어땠을까 아쉽다. 물론 지금 쓰지 못하면 영원히 못 쓸 거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품고 있는다고 이야기가 자라고 캐릭터들이 얘기해주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어차피 지금 나왔어야 할 이야기였다. 여자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말하고 자유로워지고, 또 때론 다른 존재로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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