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매튜 매서의 '사이버 스톰'
    책|만화|음악 2016. 2. 11. 05:53

    사이버 테러로 세상 모든 것이 멈춘다면? 혹독한 겨울 추위와 눈폭풍에 갇힌 채 전기, 난방, 수도가 끊긴 도시에서 얼마나 버텨낼 수 있는가?

    이번에 황금가지에서 받아본 책 [사이버 스톰]의 뒷장에 적힌 문구다. 우연인지 아님 예언인지 마침 책을 받은 날부터 한파가 불어닥쳤다. 심지어 서울이 (여름이긴 하지만) 남극보다 추웠다. 영하 18도. 전통적으로 추운 윗쪽 중강진, 삼지연은 영하 37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동아시아 주변은 얼어붙었고, 남부지방엔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 제주도에 3일간 고립된 사람들만 수만명이었다. 때마침 이 소설의 무대가 된 美동부에도 진짜 도시가 고립무원이 될 만큼 어마어마한 스노우질라(Snowzilla)가 불어닥쳤다. 책을 펼치기도 전부터 분위기 조성이 끝내줬던 셈이다. 너무나도 실감이 나서 몇 장 읽다 한기에 도로 덮었다. 우선 몸과 마음부터 녹이는 게 중요했다. 최대한 나갈 일을 줄이고, 미리 잡혔던 몇 건의 약속들과 소개팅까지 연기해 가며 추위를 원천봉쇄했다. 아니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기 위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엎드려 미드만 뒤졌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끝난 후라 마침 화제가 된 건 [미스터 로봇]이란 작품이었다. 사이버 테러를 감행하고자 하는 언더그라운 해커들의 사연을 다룬 드라마였다. 재밌게도 그리고나서 읽게 된 이 책엔 폭설과 강추위 같은 기상이변과 사이버 테러, 그 두 요소가 모두 섞여 있었다.

    매튜 매서라는 생짜 신인이 자비를 들여 출판한 이 소설은 흥미로운 컨셉과 구미를 당길 만한 태그라인을 가졌음에도 블록버스터급 막장 전개나 황당할 정도의 SF적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현혹하지 않는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핵전쟁이 발발하고,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거나 기상악화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는 스펙타클하고 버라이어티한 종말 소설과는 다르다. 대신 소시민들의 일상을 기반으로 현실감 넘치는 생생한 묘사와 디테일한 기술적 설정을 덧붙여 진짜 있을 법한 재난과 그에 대한 공포를 전달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가뜩이나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만 가는데, 이 최첨단의 상징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만물의 영장이 어느날 갑자기 바보 먹통이 되어가는 현실을 아주 담백하게 그러나 처참할 정도로 생생히 그려내고 있다. 이 무기력한 상황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언제고 무너질 바벨탑을 바라보던 그 시기의 인간들처럼 같은 과오를 되풀이한다. 거기에 기상이변과 조류독감 같은 전염병 같은 현실적인 위협이 더해지며 복잡다단하게 상황이 꼬여만 가는 재난의 삼중고는 강렬한 공포와 두려움을 가중시킨다. 이 과정을 지극히 일반인의 시점으로 담담히 고백해가는 이야기의 밀도감은 초반엔 다소 지리하고 장황스럽지만, 중반 이후 급속도로 기본적인 의식주가 무너져버리며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꿈틀될 급박한 생존에 대한 위협과 마주하게 되면서부턴 페이지터너로 손색없는 짜릿한 흥분과 가벼운 긴장을 안겨준다.

    물론 단점도 없지 않다. 고립된 지역 안에 갇혀 한정된 인물들로 극적인 플롯 없이 일상적인 부분들을 나열해가는 과정들이 느슨하고 반복된다는 점이다. (편견이겠지만 데뷔작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화려한 문체나 위트 있는 대사빨로 독자를 마취시키지도 못한다. 게다가 주인공 화자 시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설명하고 있기에 이 무시무시한 사건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데 무리가 있고, 능력치도 주인공이라고 해서 특별히 가산치를 준 게 아닌 전형적인 일반인 모드인지라 매력치가 심히 떨어진다. 그렇다고 주변 캐릭터들에게 울트라 사기 능력치를 부여한 것도 아니고, 실제 이웃에게서 볼 수 있을 법한 찌질하고 편협하며 변덕스러운 모습들을 과감없이 그려내고 있어 오히려 감정적인 피로도를 높혀주는 경향도 있다. 인종에 대해 편견이나 고정관념, 지역별 편차들도 고스란히 노출되고, 계급이나 학벌에 대한 컴플렉스나 스탠포드 감옥실험과도 유사한 분위기도 조성되는 터라 어느 정도 불편한 리얼함을 감내해야 한다. 이런 극사실적인 디테일들이 취향적인 호불호를 가져올 수 있는 것 같다. 색다른 SF, 테크로 스릴러라기보단 리얼한 관찰 카메라에 더 가까운 재난 기록물에 해당한다. 생존과 직결되는 중후반 분위기는 그 생생함으로 인해 거의 공포물에 가깝고.

    처음 책을 받기 전에 가졌던 느낌은 사이버 테러+기상이변에 대한 컨셉 때문에 [폭로]나 [공포의 제국]을 썼던 마이클 크라이튼의 테크노 스릴러 류를 떠올렸는데, 읽고 난 후엔 그와 전혀 다른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Z]를 떠올렸다. 맥스 브룩스의 소설이 위트있고, 사회적이며 거시적인 르포르타주에 가깝다면, 매튜 매서의 이 데뷔작은 보다 냉정하고 개인적이며 미시적인 르포르타주에 해당한다. 둘 다 종말로 치닿을 수 있는 어떤 사건에 대해 기록하지만, 그 사건의 원인과 결과보다는 진행 과정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단 점에서 극적인 플롯은 크게 중요치 않다. 단지 그 과정의 생생함과 현실성을 강조하는 부분들이 요새 유행하는 체험형 작품에 가깝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들의 추위와 배고픔, 불신들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그들의 시선과 편견, 사상에 갇혀 세상의 정보를 해석하게 된다. 그 좁은 시야가 바로 공포이자 불안이며, 얼마나 문명이 하찮고 우스울 수 있는지 짧게나마 경험하게 해준다. 작가는 이 상황들을 설계하고 들여다보게 한 후 현재 극대화되고 있는 '스마트한 세상'에 일종의 경고를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과연 지금 인류의 편리가 진짜 편리와 맞닿아 있는 걸까. 한순간에 무능과 마비로 꼼짝없이 퇴보해버리고 마는 시한폭탄을 만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봐야 할 때다.

    현재 20세기 폭스사에 판권이 팔려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니 과연 어떤 작품이 나올지 궁금하다. 현실적이고 답답해서 그 분위기가 배가 되었던 소설과는 분명 다른 방식이 될 텐데, 그 리얼한 미덕만큼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판 몇 개를 눌러 해킹하던 차원을 넘어 아두이노를 설치하고, 실제 리눅스와 유닉스의 네트워크 과정을 담아 진짜 같음에 놀랐던 [미스터 로봇]처럼.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