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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티븐 킹의 '별도 없는 한밤에'
    책|만화|음악 2015. 9. 23. 07:56

    해야 할 일이 잔뜩 밀려있는 와중에도 스티븐 킹의 새 중편집 [별도 없는 한밤에]를 읽었다. 장편이었다면 몇 번이나 흐름이 끊겼을지 모른다. 아니 솔직해지자. 장편이었다면 아예 일을 잠시 접고서 쭉 읽었겠지. 스티븐 킹은 내게 그런 마력을 주는 작가니까. 그의 소설은 그만큼 절대적이다. 첫 문장을 읽은 순간부터 메두사 눈빛에 굳어버린 석상이 되듯 마지막 문장까지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그 마법에서 간신히 헤쳐 나오면 어느새 타임 슬립을 한 거처럼 시간이 저만치 흘러가 있다. 그러나 이번엔 4개의 중편이 모인 책이라 부담 없이 끊어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중편집은 각 이야기 사이마다 쉬어갈 틈이 필요하다.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어 내려가기 보단, 한편 한편이 끝나고 그 이야기의 여운을 느끼고 곱씹는 편이 더 기억에 짙게 남는다. 어쩌면 조금 바빴던 게 이번 중편집의 맛과 향을 더 깊고 강하게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복수에 대한 4가지 이야기를 담아낸 스티븐 킹의 이번 소설들은 독특하거나 새롭지는 않지만, 무시무시한 그만의 매력이 아주 잘 담겨있었다. 오랜만에 킹의 독한 얘기들을 맛보게 되어 기뻤다. 조금 늦은 여름에 만나긴 했어도 아직 더운 날씨여서 이 소름 돋고 쩌릿쩌릿한 이야기들이 무척 서늘하고 시원했다.

    킹의 중편집은 [사계 Different Seasons]와 [미스터리 환상특급 Four Past Midnight], 그리고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 Hearts In Atlantis] 이후 오랜만인 듯 하다. 띠지에 닐 게이먼은 ‘스티븐 킹의 마지막 중편소설집이 될 책’이라고 얘기하는데 - 물론 광고성 멘트겠지만 - 그래선 곤란하다. 어정쩡한 분량과 하나의 테마로 묶어내기가 물론 쉽지 않지만, 킹의 중편집들은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자랑해왔단 점에서 계속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이번 [별도 없는 한밤에] 역시 단단하고 생생한 이야기들이다. 책 읽기에 앞서 경건한 마음으로 잉크 냄새를 맡아 본다. 다소 매캐하고 텁텁하지만 설레는 내음이다. 매끈한 표지와 까끌까끌한 본문의 종이도 만지며 두툼한 부피를 가늠해본다. 600쪽에 이르는 분량이 쉬 끊어지지 않을 보급품을 확보해둔 기갑부대마냥 든든한 느낌이다. 에이핑크 멤버들이 태어났을 무렵부터 킹의 소설을 이런 식으로 읽어왔으니 이젠 오랜 습관을 넘어 종교화된 의식과도 다름없다. 페이지를 넘겨 차례와 마주한다. ‘1922’, ‘빅 드라이버’, ‘공정한 거래’, ‘행복한 결혼 생활’. 이 네 개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다른 킹의 중편집들과 비슷한 분량이다.





    가장 앞에 자리한 이야기이자 가장 긴 내용을 자랑하는 ‘1922’는 대공황 시대에 아내를 살해한 뒤 서서히 몰락해가는 농부에 대해 다룬다. 딱히 아내의 복수라고 말할 순 없지만, 아내의 복수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초현실적인 악몽은 이 중편집에서 가장 세고 지독한 이야기다. 파멸을 향해 천천히 내딛는 남자의 고독하고 잔인한 운명을 킹의 끝내주는 입담을 통해서 생생하게 그려나가는데, 고어에 가까운 잔혹함과 메마른 황무지처럼 차갑고 건조한 문체가 만들어내는 비극의 하모니는 절정을 이루며 쓸쓸하고 황폐화된 고통을 안긴다. 두 번째 이야기인 ‘빅 드라이버’는 자경단 장르를 통해 풀어내는 전형적인 복수담으로, 스티븐 킹式의 [데드 위시]이자 [브레이브 원]이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가장 흔한 소재지만, 무엇보다 이 끔찍하고 생경한 범죄를 겪게 되는 여성 피해자의 심리를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필력은 가히 소설판 [네 무덤의 침을 뱉어라]라 할 만큼 무섭고 잔인하게 다가온다. 결말에 이르러서도 근원적인 구원은 피한 채, 또 다른 피해자와의 의도치 않은 공감을 통해 여전히 해소할 수 없는 불안감을 걸쩍지근하게 안기며 남성 위주의 현 사회에 대해, 그리고 심각한 성범죄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다.

    세 번째 이야기이자 가장 짧은 분량을 가진 ‘공정한 거래’는 하나의 콩트에 가까운 소설로 친구에 대한 시기, 질투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성향과 악취미적인 공상을 적나라하게 담아내고 있다.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하는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 혹은 “행복량 보존의 법칙”에 해당하는 얘기로 가정이 무너져 가는 과정을 통해 느껴지는 대리만족과 불편함의 심리를 나름 위트 있으면서도 의표 있게 찌른다. 다른 킹의 단편들에서 나타나는 페이소스와 잔인한 유머를 가장 짙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배치된 ‘행복한 결혼 생활’은 이번 중편집에서 유일하게 영화화된 작품으로 조안 알렌과 스티브 랭 주연의 [굿 메리지]라는 영화로 국내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알고 보니 내 남편은 싸이코 살인마”라는 전형적인 설정으로 시작되는 작품으로 극적인 장치나 반전은 없지만, 아내가 느끼는 배신감과 당황스런 감정을 통해 인간 사회의 신뢰와 관계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건지, 한 사람에 대해 안다는 게 얼마나 불확실한 건지 쉽고 명료하게 표현해낸다.


    여러 가지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나약하고 어리석은 부분들을 조망하는 킹의 어두운 시선은 여전하다. 때론 조소하고 때론 투덜거리며 절박한 상황과 마주한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을 드러내는 작가의 잔혹함이 때론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우화를 통해 희망의 소중함과 휴머니즘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킹의 독한 화법은 쉬 잊혀지지 않는 감동과 재미를 안긴다. 어두운 곳에 있어봐야 밝음을 안다고 명암을 극대화시켜주는 킹의 실력이 놀랍고 부럽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종이로 쿡 찍어낸 것과 같은 생생한 필력과 각 캐릭터 속의 내면을 홀랑 다 긁어낸 듯한 심리 묘사는 덤. 분명 악마에게 혼까지 팔아넘기고 얻은 작품들일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매번 놀라운 이야기들을 직조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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