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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윤철의 '신윤철 EP'
    책|만화|음악 2011. 7. 17. 06:00

    세기말에 나온 원더버드를 좋아했다. 그들의 1집 타이틀곡 '옛날 사람'은 새천년을 앞둔 그쯤에 뒤돌아보기 적절한 향수를 지녔다. 뽕기 가득한 복고적인 멜로디에 락스피릿이 절로 분출되는 단촐한 가사의 조합은 흥겨웠고 파워풀했으며 시의적절했다. 지금은 다들 내노라 하는 이력과 관록을 지닌 고구마, 신윤철, 박현준, 손경호의 화려한 조합이었다. 그때는 패기와 열정에 빛나는 인디씬의 슈퍼밴드였지만, 모든 전설이 그렇듯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앨범만이 남아 길이길이 기억될 뿐. 그 뒤 고구마는 네덜란드로 훌쩍 떠났고, 박현준은 여러 밴드 활동을 거쳤으며, 손경호는 문샤이너스로, 신윤철은 서울전자음악단을 결성해 저마다의 음악적 길을 달리했다. 신윤철이란 이름에 주목하게 된 건 그때였다. 신중현의 둘째 아들이니 시나위 신대철의 동생이니 그런 혈연관계도 일체 알지 못한 채, 그가 단지 원더버드에서 나온 기가 막힌 기타리스트라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 이후 서울전자음악단의 행보와 성과에 대해 말해 무엇하랴. 샤이키델릭한 사운드로 고색창연한 락의 기운을 내뿜는 그들은 다양한 장르를 씹어삼키고 먹어대는 전설 속 괴물처럼 존재감을 늘린 채 과거와 미래를 잇는 포스 넘치는 음악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시대에 묻히지 않는, 조류에 상관없이 떳떳한 색깔 가득한 음악들은 아이돌 가득한 황량한 벌판을 고독히 질주하는 세기말 이후 아티스트의 길을 보는 듯까지 했다. 그런데 밴드로선 만족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던 걸까. 신윤철은 17년만에 자신의 이름을 건 솔로 앨범을 내놓았다. 참가한 아티스트 면면만 봐도 벌써 범상치 않다. 리쌍의 객원 보컬이자 소울풍한 개성 강한 보이스로 사로잡는 정인, 이제는 영화음악가라는 칭호가 더 잘 어울리는 유앤미블루의 방준석,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인디밴드의 조웅, 시나위 보컬이었고 지금은 아트오브파티스에 있는 김바다, 장재원이라는 여가수까지 일종의 프로젝트성 그룹처럼 신윤철에게 저마다 목소리와 가사를 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중심을 잡는 건 역시나 신윤철의 기타다.

    수도꼭지를 팍 틀면 터져나오는 세찬 물줄기처럼 시원스레 질주하는 첫 곡 '여름날'을 들으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 기타의 청량감 넘치는 스트로크와 생생하기 그지없는 드럼의 공감각적인 사운드에 어우러진 정인의 보컬은 굉장히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기시감을 선사한다. 숙련된 베테랑들인 연주의 질감은 말할 것도 없고, 정인의 매력적인 보이스컬러는 모던락에서도 더할 나위없이 잘 어울린다는 걸 증명해냈다. 지겹게도 비 내리는 여름날, 파란 하늘을 꿈꾸며 반복해 듣게 되던 곡이었다. 분위기를 달리해 나른하고 안락한 빈티지 사운드를 펼쳐보이는 '내 맘은 끝없는 우주를 향해'는 잔결처럼 퍼져나가는 오후 햇살처럼 따사로운 노래다. 비단처럼 유려한 기타도, 이펙트 걸려 황홀하게 속삭이는 조웅의 목소리도 모두 몽환적이고 아름답다. 신윤철의 기타 연주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소소한 감흥을 만들어낸다. 김바다와의 협업 플레이가 빛나는 '누구나'는 복고적인 색채의 블루지하면서도 싸이키델릭한 사운드의 묘미를 유감없이 맛볼 수 있는 노래로, 가녀린 듯 가늘게 선 김바다의 퇴폐적인(?) 혹은 뇌쇄적인 분위기가 일품이다. 하몬드 오르간과 기타의 호소가 밤의 열기처럼 끈적하니 귓가에 달라붙는다.
     
    과거 복고지향적인 락 사운드를 구현한 '소년시대'는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운드디자인만큼이나 아련한 가사가 조금은 뭉클하게 다가오는 노래다. 보컬리스트로 방준석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묘미가 있는데, 유앤미블루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목소리에 담긴 특유의 떨림과 비음이 짙은 회한과 아쉬움을 더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를 잇는 '꿈같은 하루들'은 장재원이라는 베일에 쌓인 여가수가 부르는 서정적인 포크송. 앞선 싸이키델릭하고 락적인 분위기를 말끔히 제거한 채 어쿠스틱 기타와 담백한 목소리에만 의지한 채 삶에 대해 노래한다. 극적이고 화려하진 않지만 잔잔하니 가슴을 울리는 선율과 고백과도 같은 가사가 어우러지며 속 깊은 울림을 던진다. 유일하게 신윤철 자신이 직접 부른 마지막 곡 '비 오는 날' 역시 그 감수성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포크송. 아날로그 녹음 특유의 질감과 함께 처량맞은 빗소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데, 어쿠스틱 기타의 포근한 연주가 그의 기교없는 무덤덤한 목소리와 만나 묘하게 슬픔을 배가시킨다. 노래 끝난 뒤 20여초가 지나면 히든 트랙으로 신윤철의 그루브하면서면도 싸이키델릭한 보너스 연주가 등장한다. 짧은 만남이 아쉽기라도 한 듯 혼과 열정이 담긴, 7분이 넘는 기타 소리는 그의 진가를 확인시켜 줄 흥겹고도 신명나는 연주 한마당이다.

    분명 6곡만 담긴 짧은 프로젝트성 EP 앨범이지만, 정규 앨범 못지 않은 풍성한 부피감과 깊이를 갖췄다. 뚜렷한 야심이나 광기 어린 완성도의 충격파를 던져주는 건 아닌데, 듣고 있으면 그저 배부르다. 곡 하나 하나 마다 장르를 넘나들고 화려한 테크닉이 곳곳에 숨어있는 게 아님에도 이처럼 매력을 갖게 만드는 건, 신윤철만의 음악적 색채가 더욱 공고해졌음을 의미하는 바가 아닐까. 비록 80년대 후반부터 내놓은 솔로 앨범부터 그를 접하진 못했지만, 원더버드 때부터 서울전자음악단에 이르기까지 그가 꾸준히 완성해나간 음악적 족적은 흔들리지 않고 확실히 뚜렷해졌다. 그가 만들어갈 다음 발자국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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