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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hirosky의 'The Orbit'
    책|만화|음악 2010. 12. 27. 12:24

    얼마 전 누자베스가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쓸쓸하게. 고인이 된지 한달이 넘은 후에야 간략하게 언론 발표를 통해 알려졌다. 안타까웠다. 그의 공연을 보러다니고, 모든 앨범을 소유할만큼 열성팬은 아니였지만, 애니메이션 [사무라이 참푸르]를 통해 처음 접한 그의 음악은 가히 별천지 신세계였다. 다채로운 장르의 접목과 놀라운 센스로 중무장한 재능에 반해 조금씩 찾아듣곤 했었다. 힙합 인스트루멘탈이라 통칭해 말들 하지만, 사실 누자베스를 어느 장르로 묶어 딱히 정의내리긴 쉽지 않다. 고전에서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샘플링과 적재적소에 위치하는 소스, 해체와 재조립을 통해 새로운 패턴을 창조해내는 천부적인 감각은 원곡과 장르를 뛰어넘는 감흥과 판타지를 심어주었기에. 음악의 시간여행자이자 트랜스포머. 그는 시대와 조류를 초월한 음악가였다. 그래서 그의 부재가 두고두고 아쉽고, 또 계속 계속해 떠오른다.
     
    국내에서도 이런 스타일의 아티스트와 만날 수 있을까 반신반의 하고 있었는데, 타블로와 Pe2ny가 만난 이터널 모닝이나 소울스케이프, 더 콰이엇 등의 몇몇 팀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대중적으로 비록 큰 성공을 거두거나 화려하게 주목받진 못했지만, 그러한 시도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음악적 영역확장과 탐구정신, 그리고 도전의식 만큼은 박수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황무지 같은 장르에 Shirosky라는 겁없는 신인이 뛰어들었다. 23살의 여성 재즈힙합 프로듀서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그녀의 이력은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는데, 힙합 프로듀서이자 이터널 모닝에서 이런 유형을 경험한 바 있는 Pe2ny가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서 흥미가 돋았다. 파워풀한 비트와 소울이 담긴 플로우, 저항정신이 물씬 풍기는 시 같은 라임이 휘몰아치는 힙합씬에서 과연 그녀는 어떤 색채를 들려줄 것인가. 남자임에도 여리디 여린 감수성까지도 잘 담아내던 누자베스를 떠올려 본다면 Shirosky도 자신만의 섬세한 비트와 감수성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 가닥의 기대는 점점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층층이 쌓여가며 화음을 만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MYK의 편안한 아나운싱. 'Intro'는 간단한 소개에 해당하지만 정갈한 비트와 반복된 구조로 본 앨범이 어떠한 색채를 띌지 쉽게 짐작케 한다. 본격적인 시작은 자신의 이름을 건 'Shirosky'부터. 그루브하고 소울 충만한 섹소폰과 피아노가 느린 힙합 비트와 만나 차분하고 재지한 느낌을 선사한다.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단조로움이 아쉽지만, 여성 특유의 섬세한 데코가 그나마 선방하고 있다. 바로 이어지는 'Close to You' 역시 섹소폰과 피아노의 짙은 음색이 두드러지는 곡. 여기에 김새한길의 호소력 있는 보컬이 조화를 이루며 감미로운 분위기를 창출해낸다. 애수가 느껴지는 동시에 역동적인 감흥이 일어나는 매력적인 트랙이다. 인스트루멘탈을 강조했던 탓인지 L.E.O.의 랩을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는 기회마저 빼버린 얄팍한 속지가 안타까웠던 'Life Trail'은 L.E.O말고도 Mini의 피쳐링이 두드러지는데, 악기처럼 아름다운 스캣이 감정을 움직이게 만든다. 이를 잘 통제하는 Shirosky의 프로듀싱이 빛을 발하는 트랙.
     
    감미로운 풍취가 가시고나면 몽환적이고 반복적인 구조의 'Lost Atlantis'가 이어진다. 단조롭고 밋밋한 진행이지만 상실감을 나타내려는 듯 점층적으로 쌓여가는 다채로운 이펙트와 물결치는 피아노가 바다 속에서 유영하듯 부유하듯 흐늘거린다. 슬로우 템포의 드럼비트로 시작을 알리는 'Love BPM 92'는 부드러운 Basick의 랩과 Jungsshin의 허스키한 보컬이 어우러진 러브송. 쌉시한 가을 뒷맛과도 같은 브라운 톤의 색채감이 드는 곡이다. 샘플링의 효과가 극대화된 'Smooth Dream' 역시 반복과 패턴이 두드러지는 작업물. 이를 통해 몽환적이고도 감각적인 효과를 창출하는데 성공하지만, 문제는 지리한 맛을 감출 수 없다는 게 아쉽다. 중간의 은은한 심벌이 자명종 초침처럼 느껴지며 샘플링의 변조를 통해 곡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에디트 피아프 노래가 흘러나온 [인셉션]의 스코어를 잠깐 떠올리기도 했는데 그런 환상적인 분위기가 그래도 아름답다. 인디밴드 초면의 보컬 Xyuna의 간들어지고 새된 목소리가 울림이 좋은 Jean Green의 랩과 잘 조화된 'Music'은 초반 느낌은 좋지만 뒤로 갈수록 변화없는 반복에 아쉬움이 쌓이는 곡. 진행에 있어 조금의 변주만 느껴졌어도 퍽 재밌게 다가왔을텐데 2% 부족한 만듦새가 마음에 걸린다.


    영롱한 신디가 70년대 퓨전을 떠올리게 만드는 도입부의 'Peacemaker'는 그 시작과 다르게 가장 앨범에서 이질적인 질감을 자아낸다. 다소 가볍고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TiMe\iNe의 빠른 랩핑은 그간 앞선 피쳐링과 달리 낭만적이고 여유로운 플로우를 찾아볼 수 없다.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니였나 생각해본다. 온기 없는 'Solar return'도 아쉬운 선택. 앞선 트랙들에서 느껴지던 따스함은 사라진 채 차디찬 공허만이 들어차 반복되는 5분간의 사운드 행렬은 듣는 이를 쉬 지치게 만든다. 다채로운 비트와 혁신적인 시도가 있었다면 실험적인 색채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텐데, 인더스트리얼도 힙합 인스트루멘털도 아닌 어정쩡한 결과물이 되어버렸다. 슬슬 마지막이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건 'Close to You'의 연주버전 때문. 그러나 김새한길의 피쳐링이 없어도 꽤나 탐미적인 곡임에는 틀림없다. 그녀는 이런 스타일에서 편안하면서 무드있는 분위기를 충분히 뽑아낼 수 있는 좋은 감각을 지녔다. 그리고 다시 반복. 아름다운 목소리가 층층이 쌓여가며 화음을 만든다. 이어지는 편안한 아나운싱. 그러나 이번엔 여자다. Bliss-J가 피쳐링한 'Outro'. 국내 유일의 여성 재즈힙합 프로듀서를 강조한다면 차라히 Outro와 Intro를 바꾸는 게 낫지 않았을까.
     
    기대한 만큼 아쉬움도 크지만, 무엇보다 이 척박한 토양에 뿌리를 딛고 선 그 결실이 대단하다. 상업성 없는 장르라 치부하며 관심조차 가지지 않은 시장에 나선 열정과 참신한 시도가 아름답다. 게다가 아직 젊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녀는 더 깊고 다양한 실험과 센스를 늘려나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Shirosky는 아쉽지만 실망감은 들지 않는, 가능성의 재즈 힙합 인스트루멘탈 앨범이었다. 그녀는 궤도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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