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
요코야마 히데오의 '종신검시관'책|만화|음악 2008. 7. 14. 23:33
검시관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무시무시함(?)과 달리 8개의 연작 미스테리가 담긴 이 단편집의 묘미는 잔혹이라던가 퍼즐이라기 보단 감동이다. 논리적이고 명석한 트릭과 반전으로 무장돼 뒤통수를 때리는 치밀한 설계의 미학이 아닌 한박자 헐렁하고 의외성 높은 인간의 심리와 감정을 앞세워 독자를 사로잡는다고 할까. 그 중심에는 8편 모두 직간접적으로 등장해 사건을 파헤치는 '구라이시'라는 종신검시관 캐릭터가 한몫한다. 시니컬하면서도 인간적인 구라이시는 때론 명탐정의 모습으로, 때론 현자의 모습으로 여기저기 사건에 참견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던 사건의 진실을 바로잡게 만든다. 그 내면에 깔린 세상사의 기저가 감동과 울림을 선사하는 것. 사건을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얽히고 섥힌 오해와 증오, 사랑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
미야베 미유키의 '스나크 사냥'책|만화|음악 2008. 6. 4. 19:48
루이스 캐롤이 쓴 '스나크 사냥'은 언어유희로 가득한 현실 풍자시였다. 미야베 미유키에 의해 재해석된 '스나크 사냥'은 현실 부조리를 담은 하드보일드 소설이다. 둘의 차이가 영국 빅토리아 왕조 시대와 일본 현재 사회와의 간극이 아닐까. 열 명의 폐부를 찌르는 어이없고도 잔인한 말장난들의 관계는 폭력과 우연 그리고 비극으로 점칠된 여러 명의 관계로 변질됐다. 그러나 그 속에 숨어있는 본질까지 변한 건 아니다. 세상은 놀랍도록 변해가지만 그 안의 부조리와 폭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 다르면서도 같은 의미를 함축한 미미 여사의 스나크 사냥은 루이스 캐롤의 스나크 사냥만큼 심오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삥 돌려 에둘러 표현하던 방식도 단선적이고 스피디하게 바꿨다. 구조는 꼬아놨지만 플롯 자체는 간단하다. 그녀..
-
요코야마 히데오의 '루팡의 소식'책|만화|음악 2008. 3. 24. 23:34
좋은 제목은 떡밥을 넘어 영감을 안긴다. 작은 흥미와 호기심이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결정적이고 중차대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누구나 다 아는 괴도 루팡의 이미지를 '소식'이라는 귀가 솔깃해지는 단어와 결합시켜 궁금함을 자아내는 이 작품은 그 제목만큼이나 강력한 흡입력과 재미로 중무장한 미스테리물이다. 15년이라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과거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그 당시 학생 3명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해가는데, 중간중간 청춘물과 본격 미스테리, 사회파 요소들을 촘촘히 엮어 달리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 작위적이라 느낄 수 있을 만큼 모든 사건을 끼어 맞춘 듯한 결말이 2% 안타깝게 느껴지지만, 모두 다 완벽할 순 없는 일. 분명 재미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후회라는 단어를 전혀 떠오르지 못하..
-
미야베 미유키의 '이름없는 독'책|만화|음악 2008. 3. 15. 23:14
두툼한 분량임에도 걱정하지 않고 집어 들 수 있는 건 미야베 미유키 때문이다. 그녀의 필력이라면 30권짜리 무협추리라도 즐겁게 읽겠다. 필력이 있다는 건 멋진 문장과 대사, 좋은 구조만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다. 정신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흡입력, 그 매력이 글자 하나하나에서 베어나와야 한다. 푹 고아낸 육수 국물에서 우려낸 듯한 아우라가 독자를 감싸고. 누가 어디서 방해를 해도 다시 책을 집어들어 책장을 넘길 수 있게끔 해야 한다. 미야베 미유키는 그렇게 만든다. [누군가]의 후속으로 쓰여진 작품이지만, 설정과 등장인물이 같다는 거 빼곤 직접적으로 이어지지 않기에 이 작품부터 집어들었다. 의심심장한 제목만큼이나 직접적으로 사회와 인간의 독성에 대해 토로하는 이 소설은 그녀의 출발지점이 사회파라는 걸 어김없..
-
미야베 미유키의 '마술은 속삭인다'책|만화|음악 2008. 1. 31. 23:22
거장에게도 습작이 있고, 데뷔작이 있기 마련이다. 탄탄한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이 소설이 바로 그 반증이다. (발표된 순서대로 읽지 않으면 이런 점에서 종종 실망감이 들곤 한다...) 전혀 연관 없고, 살인이라 볼 수 없는 3건의 자살을 통해 주요인물을 등장시키는 도입부는 상당히 흥미롭다. 거기에 서브리미널 광고와 최면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도입해 일반적인 사회파 추리소설에서 조금 벗어난 것 역시 신선하고. 그러나 2개의 큰 플롯을 무리하게 접목시킨 구조와 범인의 동기는 허술하고 작위적이다. 개연성이라던지, 설정들이 좀더 촘촘하게 이루어졌다면 직조 솜씨가 빛났을텐데, 아직 이때의 그녀는 지금의 내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충분히 즐길만 하다는 거... 괜히 미야베 미..
-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책|만화|음악 2008. 1. 14. 22:18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읽어보려 벼르고 있던 건 사실이다. 이 작품이 아닌 [스나크 사냥]과 [모방범]이었지만. 하지만 대타로 집어들었다 해도 [화차]의 눈부신 명성을 전혀 몰라뵜던 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리던 이 소설을 모를 리 없다. 귀에 딱지가 베기도록 칭찬을 들었으니까. 사실 미야베 월드로 들어서기 위한 입장권을 너무 좋은 걸로 골라잡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 기대감을 이 작품은 여지없이 채워주었다. 15년 전에 나온 소설이지만, 지금 현재 한국 사회에도 통용될 정도로 긴 생명력과 현시성을 갖췄다. 두툼한 분량임에도 빠르게 읽히는 건 물론이거니와, 요새 유행하는 반전이나 잔혹한 스릴러 코드를 갖추지 않아도 몰입감과 재미가 상상초월이다. '빨려들어간다'는 의미는 이..
-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책|만화|음악 2008. 1. 7. 21:57
안타깝게도 현재 추리소설에서 본격(혹은 고전) 형식의 퍼즐 미스테리를 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기술의 진보와 매체의 다양화는 더 복잡하고 과학적인 사고와 자극적인 흥미만 요할 뿐, 페어 플레이 속에 피어나는 논리정연의 중요성은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다. 픽션들보다 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 없는 현실의 무자비한 사건사고들이 가져다 주는 충격파가 한몫 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런 면에서 현재 추리소설은 하드보일드와 사회파라는 스릴러, 반전과 싸이코패스 그리고 CSI만 남아 있을뿐, 엘러리 퀸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반 다인 등의 고전적 품격은 쥐도 새도 모르게 날아가 버렸다. 여기 1987년 혜성처럼 등장한 아야츠지 유키노의 이 데뷔작은 그런 고전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오마쥬이고, 복고지향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