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셀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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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Z'책|만화|음악 2008. 10. 5. 23:35
가상 역사 소설은 많지만, 이처럼 좀비물에 대입해 다양한 콜라주를 뽑아낸 작품은 없을 것이다. 조지 로메로의 좀비물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이 소설은 필경 우습고 잔학하게 보일지 몰라도 어설프게 고어적인 효과만을 노린 단순한 공포물이 아니다. 윤리적이고 공황적인 딜레마를 다루며 인간과 사회에 짙은 페이소스를 던져준 로메로의 (초기) 좀비 3부작처럼 리얼하고 풍자적이며 사색적인 뉘앙스를 진하게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류 인플루엔자와 광우병 같은 바이러스가 설치는 현 시점에서 좀비는 그런 것들에 대한 점잖은 은유일런지도 모른다. 인터뷰와 보고서라는 구체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생생하고 다양한 시선을 담고 있으며, 현실의 국제 정서나 각 나라별 현황들을 꼼꼼하게 다뤄 가벼이 읽히기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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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리처드 매드슨의 '줄어드는 남자'책|만화|음악 2008. 7. 24. 23:37
강렬하다. 삶에 대한 의지와 고독에 대한 절절한 토로(吐露)가. [나는 전설이다]에 이어 쌍둥이처럼 닮은 이 작품 역시 극한 상황에 치달은 한 개인의 아슬아슬한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피적인 모험 이면엔 개인적인 성찰과 두려움 그리고 변화된 삶에 맞서 싸우는 힘없는 자아의 외로움이 듬뿍 담겨있다. [나는 전설이다]가 외부에 홀로 남겨진 자의 울부짖음이라면 [줄어드는 남자]는 내부로 깊이 침잠하며 단절된 자의 아우성이다.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또 개척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비망록이자 묵시록인 셈이다. 리처드 매드슨은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독특한 소재를 너무나도 생생하고 스릴 넘치게 그려낼 수 있는 재주를 지녔다. 게다가 소름끼치게도 그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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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의 '코로나도'책|만화|음악 2008. 1. 4. 21:17
인간에 대한 묵직하면서도 어두운 포스를 무럭무럭 안겨주는 데니스 루헤인의 글발은 새벽 3시 심야 라디오 DJ의 나지막한 목소리 같다. 이내 맞이할 밝은 아침을 이야기하지만 지금은 어둠이라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하면서도 강직한 울림을 갖기 때문이다. 우울하면서도 쌉씨한 인물군상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는 결코 유쾌한 작가가 못된다. 그렇다고 속사포처럼 쏴대는 랩처럼 독한 맛을 지니고 있지도 않고. 그저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지하철역 길바닥 어딘가에 조용히 앉아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면 추적 60분 속의 아이템마냥 어마어마한 이슈 보따리를 풀어내는 도시 빈민층의 제보자 같단 생각뿐이다. 그가 말하지 않으면 결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진실을 가진. 이 단편집은 그러한 심증을 더욱 굳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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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펠레카노스의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책|만화|음악 2008. 1. 2. 14:15
더쉴 해미트와 레이먼드 챈들러가 하드보일드의 프로토 타입이라면 미키 스필레인이나 로스 맥도널드는 초호기다. 그리고 엘모어 레너드와 제임스 엘로이로 진화해, 데니스 루헤인과 조지 펠레카노스 같은 아이들(?)이 탄생했다. 데니스 루헤인이 보다 본격적이고 문학적인 본질을 꿰찬다면 조지 펠레카노스는 TV스럽다. 보다 상스럽고 자극적인 소스의 맛이랄까. 미키 스필레인 소설만큼이나 스피디하게 읽힌다. 마초적이고 단순무식한 건 비슷하지만, 스필레인만큼 무대뽀로 흐르진 않는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전후 매카시즘이 판을 치던 때와 다른 맛을 갖는 건 당연지사겠지. 까끌까끌하면서 정제되지 않은 표현과 사상에 부딪치긴 하지만, 그 거칠고 진한 맛이 매력이다. 내용과 구조는 복잡하지 않다. 비슷하게 찍어대는 싸구려 펄프픽션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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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노 나쓰오의 '암보스 문도스'책|만화|음악 2007. 12. 13. 23:35
엄밀히 말하자면 이 단편집은 추리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 비밀, 섹스, 음모, 배신, 추억, 소외, 사랑과 공포를 다루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지극히 냉정하고 노멀하기 때문에. 소설 어디에도 스릴과 트릭을 느낄 수 없다. 대신 어떠한 범주로도 정의할 수 없는 기리노 나쓰오만의 다크 월드가 존재할 뿐이다. 비등점에 다다른 뜨거운 소재들을 이처럼 차갑고 비정하게 내뱉는 그녀의 문체는 매혹적이다. 거부감이 들 정도로 톡 쏘는 와사비 맛과 같다. 그녀만의 강렬하고 일탈적인 여성 캐릭터는 여전하고, 일반적인 모럴을 손쉽게 뒤집는 인간의 탐욕과 시기로 점철된 세상 역시 그대로다. 부정적이고 삐딱한 세계 속에 살아 숨쉬는 군상들은 치졸하고 더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를 묘사하는 그녀의 시선은 지극히 담담하고, 가라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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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노 나쓰오의 '아임 소리 마마'책|만화|음악 2007. 12. 12. 23:27
기리노 나쓰오. 현재 한국에서 미야베 마유키와 함께 가장 잘나가는 일본 여류 추리소설 작가. 극강의 포스와 전설적인 소문을 동시에 자랑하는 그녀의 대표작 [아웃]을 먼저 읽고 싶었지만, 언제나 대출중이란 표시에 눈물을 머금고 대타로 골라 잡은 게 [아임 소리 마마]다. 짧은 분량에 깔끔한 문체는 쉽게 읽히지만, 까끌한 소재와 가학적인 심리 묘사가 뒷끝을 심하게 남긴다. 트릭 위주의 미스테리나 심리 스럴러의 느낌이라기보단 사회파 고발소설에 가깝다. 로스 맥도널드같은. (드세고 공격적인 성향의) 일탈적인 여자 묘사에 일가견이 있다는 소문대로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코는 성인의 모습을 한 어린아이이자 괴물이다.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그녀는 옳고 그르고가 아닌 좋고 나쁘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의하기에 더욱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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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책|만화|음악 2007. 11. 14. 18:06
톰 고든은 보스톤의 마무리 투수 이름이다. 스티븐 킹은 보스톤의 열혈광 팬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야구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고 공포 소설을 표방하지도 않는다. 제목만 보면 토니 스콧의 [더 팬]이 떠오를 법하지만, 실상 소설은 리 타마호리의 [디 엣쥐]에 가깝다. 11살 소녀의 고군분투 조난기가 담긴 모험 소설인 셈. 200 페이지가 넘는 소설 내내 악당도, 조력자도, 그렇다고 극적인 플롯도 없이 어린 소녀 하나만으로 끝까지 간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조마조마한 심정을 이끌어내는 킹의 글발은 정말 대단하다. 당장 뛰어들어가 구조해주고 싶은 생생한 묘사력과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 구축이야말로 이 소품을 더욱 빛내준다. 공포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욱 무섭고 두려운 법, 킹은 진짜 무서움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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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의 '아켈다마'책|만화|음악 2007. 6. 18. 20:38
팩션(Faction)이 인기다. [다빈치 코드]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예로부터 팩션은 많은 인기와 사랑을 누렸던 장르다. 다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후로 이 장르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듯 싶다. 정교한 자료 고증에 뛰어난 상상력을 바탕으로, 과거 음모 이론만 들이대던 어드벤쳐물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요 근래 나오는 팩션들은 모두 에코의 후계자를 자처한 듯 하다. 때론 무슨 역사책 보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으니. 우리나라도 다양한 팩션들이 있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나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 이정명의 [뿌리 깊은 나무] 등 주로 조선시대를 무대로 삼고 있다. 김명섭의 [아켈다마]는 이런 전형성에서 반기를 든다. 십자군 원정으로 유명한 성전 기사단과 악마주의를 바탕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