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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발이의 소풍의 '천천히 다가와'
    책|만화|음악 2012. 5. 2. 12:59


    인생 참 맘대로 안된다. 계획한대로,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잔인하게도 삶은 투자한 만큼 이익률을 볼 수 없는, 그렇다고 로또가 터질 확률도 아주 없지 않은, 신의 윷놀이판과 같다. 사실 그 예측할 수 없는 랜덤성 때문에 재미와 감동(심지어 아픔과 고통까지도) 배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 유발이도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프랑스에서 음악 공부 삼매경에 빠졌어야 하지만, 현실은 컨템포러리 재즈 밴드 '흠 Heum'의 피아니스트 겸 유일한 여자 멤버인 동시에 프로젝트성 그룹 '유발이의 소풍' 리더로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유려한 멜로디에, 독특한 애수를 지닌 분위기, 탄탄한 실력이 어우러져 웨이브나 윈터플레이, 푸딩의 뒤를 이을 재목이라 생각했던 '흠'의 멤버라면 '유발이의 소풍'도 혹시 그런 뉘앙스를 갖지 않을까 싶었는데, 착각이었다. 멤버만 공유한 '유발이의 소풍'은 '흠'과는 전혀 다른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다.

    2년전 4월, 크라잉넛의 한경록과 이한철, 좋아서 하는 밴드의 조준호가 피쳐링으로 참여한 1집을 통해 이미 '유발이의 소풍'은 자신들의 색깔을 드러낸 바 있는데, 피쳐링도 줄고 멤버도 빠져나가 사실상 유발이 혼자만의 원맨 밴드가 되어버린 2집에선 보다 그 노선을 더욱 바짝 밀어붙인다. '봄이 왔네'같은 왈츠풍의 동요 같은 노래를 선보이거나 소박하고 잔잔한 '이른 새벽 이야기' 같은 소품, 재즈와 보사노바 경계를 넘나드는 빈티지스런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봐주세요' 류의 경쾌한 스타일이 공존하던 1집처럼, 이번에도 역시 동요 같은 멜로디에, 잔잔한 포크와 재즈를 오가는 크로스오버적인 탈장르적 자유분방함, 그리고 만화 같은 상상력이 빛나는 가사가 조우해 종잡을 수 없는 유발이만의 스타일을 완성지었다. 물론 정형적이지 않은 형식과 유치해보일 정도로 솔직한 감성이 묻어나는 보이스톤, 계속 착하기만 한 사운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겠지만, 하나 분명한 건 그 어떤 음악들보다 자극적이지 않고 편안하며 흥미롭다는 사실이다.


    시작은 그녀의 가장 빛나는 장기인 피아노, 그 한 대로 이뤄진 소품 '봄, 그리고'로 짧지만 변화를 던져주고 사라지는 봄기운을 담아내듯 잔잔하게 펼쳐진다. 마이클 존스의 피아노 연주를 떠올리게 할 만큼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만약 연주곡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그 뒤를 잇는 건 분위기를 반전시키듯 산뜻한 업비트의 보사노바 기운을 머금은 '소풍'으로 요즘 날씨에 가장 잘 어울릴 법한 노래다. 귓가를 산들산들 간지럽히는 연주와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은 보드러운 목소리가 앙증맞고 편안하다. 세 번째 트랙에 자리잡은 '시계'는 제목대로 시계벨 소리처럼 반복되는 도입부와 궤종시계 초침을 연상케하는 사운드가 어우러져 독특한 노래를 만들어냈다. 다소 정신없는 분위기긴 하지만 그 정제되지 않은 색채가 풋풋하고 인상적이다. 타이틀곡 '천천히 다가와'는 산 속을 거니는 듯한 엠비언스 소리 속에서 수줍고 몽환적으로 세상 모든 것에 주문을 건다. 너무 빨리 변해가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세상이 버거운 소녀가 역설하는 슬로우 라이프의 투정이 귀여운 왈츠풍의 리듬에 담겨진 귀여운 노래다.

    2집에서 유일하게 피쳐링이 이루어진 '선물'은 이런 동요틱한 사운드의 원조로 손꼽히는 산울림의 김창완이 직접 참여해 더욱 뜻깊은 '선물'을 만들어낸다. 아동틱한 유발이의 목소리와 달리 깊은 저음에 느릿한 떨림을 가진 김창완의 조화는 다소 이질적이고 기괴(?)하다고 느껴질 만큼 파격적인데 그 언발란스하면서도 또 그럴듯하게 맞아들어가는 노래가 쉽게 잊혀지지 않을 잔상을 남긴다. 도레미파솔파미레도시도레솔. 이거 후크보다 더 중독적인 후렴구다. 그 뒤를 잇는 'You Really Could'는 제목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본 앨범에서 유일하게 영어로 된 노래로, 잔잔한 피아노 터치와 깨끗하고 투명한 보이스컬러가 조화돼 가슴에 동심원을 그리듯 파장이 되어 퍼져나간다. 앞선 아동틱한 솔직한 감정이 묻어나는 톤과 달리 대중적이고 자연스런 보이스가 유발이를 다시 보게 만든다. 울음이 섞인 짧은 전화통화의 스킷이 지나가면 이 앨범에서 가장 빠르고 강력한(?) 락사운드의 '엄살'이 펼쳐진다. 스킷의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은데 굳이 넣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맘대로 안되는 인생, 유발이 자신에게 상당히 의미심장한 시기이자 고비라 생각됐기에 곧 그 필요성이 납득됐다. 엄살 부리듯 고집스런 감정을 양 볼에 가득 담아 부르는, 다소 만화주제가스러운 느낌도 있는, 그러나 가사는 상당히 멋진, 개인적으론 강추하는 킬러 트랙이다.


    편안한 기타 소리가 느릿하니 듣는 이를 사로잡는 '향기'는 무공해표 치유계 포크송이다. 인상적인 멜로디와 특별한 진행은 없지만, 반복적인 가사와 맑은 보이스로 향기를 더욱 짙게 하는 포근포근한 감수성은 온 몸과 마음을 노근노근 녹게 만든다. 10번째 트랙을 장식하는 건 '휴지에 칸이 없네'라는 독특한 제목의 노래. 앞선 타이틀곡 '천천히 다가와'처럼 엠비언스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일상적인 디테일과 참신한 재미를 안겨주는 키치적이고 유쾌한 소품이다. 이런 막가파(!)적인 무정형성이 '유발이의 소풍'만의 고유한 사운드를 드러내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고보니 '흠'의 보컬곡이었던 'JJ'의 후렴구에서도 이런 유발이의 엉뚱한 유머의 매력이 드러나긴 했었다. 시원스런 파도 소리가 들리는 '바다의 노래'는 그녀의 서정적이고 유려한 피아노 솜씨를 또 다시 유감없이 감상할 수 있는 곡이다. 다소 처지는 분위기와 절제하지 못한 파도 소리가 다소 아쉽지만, 애잔한 감성이 묻어나는 사운드는 가슴을 흔들기 충분하다. 봄을 지나 여름을 거쳐 가을로 휙- 빠르게 넘어간 마지막 곡 '전어야 고마워'는 동요풍의 사운드가 재밌는 노래. 스타일은 비록 틀리지만 가사나 소재 잡는 면을 살펴보면 소녀 윤종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디테일한 일상성에 주목하는 게 비슷하게 느껴진다.

    1집이 계획되지 않은 우연의 산물로 인해 태어난 로또 또는 업보(!)였다면 다양한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나온 '유발이의 소풍' 2집은 자신의 장점과 색깔을 뚝심있게 밀어붙인, 비장의 일기장 같다. 참신하고 자연스러운 음악들이 비록 취향을 탈지라도 자신에게만은 더없이 소중할 수 있는 기록이자 성장판이기에, 그녀의 음악은 오늘도 씩씩하고 아름답다. 어차피 맘대로 안되는 인생이라면, 이렇게 편안히 느긋하게 소풍 떠나는 기분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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