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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준, 최희진의 '김성근 그리고 SK와이번스'
    책|만화|음악 2012. 4. 18. 02:50


    야구에 눈을 뜬 건 MBC 청룡을 응원하던 형 때문이었다. 물론 팀을 바꾸게 된 것 또한 형 때문이었고.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별 시덥지 않은 문제로 쌈박질을 하고 형과는 절대 같은 팀을 응원하지 않겠다는 월하의 맹세를 하며 별 연고도 없던 - 그저 장효조 이만수 김성래의 막강 화력 클린업 트리오에 반해 삼성으로 갈아탔었다. 유치한 발상에서 나온 선택이었지만 그 후 25년간 이 팀을 응원하고 있으니 사람 인생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990년 MBC에서 막 바뀐 LG와 삼성 간의 한국시리즈는 그래서 우리 형제에겐 일종의 자존심 승부가 걸린 대리전 양상을 띄었는데, 허무하게도 4연패로 지고 며칠간 눈물을 삭히며 질풍노도의 시기를 인고의 나날로 보내야만 했었다. 그리고 12간지가 한바퀴 돌아 마침내 찾아온 2002년의 리턴매치.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캠페인을 줄기차게 내보내던 만년 2등이자 준우승 9회의 삼성은 LG를 꺾고 역사적인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거머줬다. 그 충격파와 어이없는 감독 경질 소식에 격분한 형이 이번엔 팀을 떠나버렸고, 그때의 LG 감독이 바로 '야신' 김성근 감독이었다.

    사실 그 전까지 김성근 감독은 내게 수많은 대한민국 야구감독 중 한 명이었을 뿐, 특별히 각인되던 인물은 아니였다. 심지어 내가 응원하던 삼성에서도 91년 92년 감독을 역임했고 꽤 나쁘지 않은 기록을 냈지만 자신의 색깔을 만들지 못한 채 지휘봉을 내려놔야 했다. 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던 건 재정이 극도로 안좋았던 만년 꼴찌팀 '헝그리' 쌍방울 레이더스를 포스트 시즌에 올려 놓으면서 부터였다. 아쉽게도 IMF로 인해 팀이 공중분해되고 말았지만, 그 기세를 몰아 LG로 옮긴 그는 94년 우승멤버들을 데리고 4위로 PS로 올라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해 6차전까지 가는 드라마를 펼쳐보였다. 이에 감탄한 김응룡 감독이 '야신'이란 별명을 붙여준 건 널리 알려진 사실. 하지만 더 큰 반전은 시즌이 끝난 후 터졌으니, 준우승팀 감독의 이해할 수 없는 경질이 바로 그것이었다. 졸지에 야신(野神)에서 야인(野人)이 되어버린 김성근 감독이었지만, 휴지기를 거쳐 2006년 SK로 복귀한 그는 더욱 업그레이드돼 강해져 돌아왔다. 야구명가 해태 이후 두 번 다시 나올 것 같지 않았던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에, 3번 우승 1번 준우승이란 기록을 남겼으며, 사실 그가 '또 다시!!' 경질만 되지 않았어도 대한민국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5회 연속 진출이란 기록은 김성근 감독에게 명예롭게 헌정됐을 것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안다. 김성근의 SK 와이번스가 어떤 팀인지. 절대로 상대로 맞붙기 싫은 팀. 지치지 않고 선수들이 샘솟는 팀. 쉽게 지지 않는 팀이란 걸. 야구를 모르는 사람도 알 거다. 김성근의 SK 와이번스가 어떤 팀인지. 인천 연고를 바탕으로 한 우승팀. 당연히 한국시리즈에 나가는 팀. 그러나 그가 감독이 되기 전까지 SK 와이번스가 두 번을 제외하고 가을 야구를 경험하지 못했고, 창단 초기 홈 관중 수가 10만명이 채 안됐다는 사실은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김성근 감독의 아들이자 최고의 전력분석코치로 손꼽히는 김정준 해설위원과 최희진 기자가 공동 집필한 '김성근 그리고 SK 와이번스'는 그런 야신이 최강의 포스를 발휘하던 바로 그 시절 - 2006년부터 2011년 경질당하기 전까지 모든 기록을 담아낸 책이다. 단순히 김성근 감독의 업적과 경력을 칭송하고 찬탄하는 어용가가 아닌, 5년간 야신이 팀구성과 선수 관리를 어떻게 해왔는지 야구에 대한 철학과 정밀한 시스템에 대한 고찰이 담긴 일종의 경영서이자 야구 운영 교과서이기도 하다. 더불어 그의 안타까운 경질과 관련된 (아들이자 같은 스탭이었던 김정준 코치의) 생생한 증언과 기록을 통해 현 대한민국 프로스포츠에 만행한 프론트의 전근대적인 방식에 대한 통렬한 고발과 안타까움을 담고 있는 르포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총 14장으로 구성된 책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김성근의 SK 와이번스 왕조가 건립되는 과정을 상세히, 그리고 그의 부재로 인해 허둥대는 2011 시즌의 막바지를 대비해가며,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초창기 전훈 캠프지의 변경에서부터 지옥 훈련으로 대표되던 특타에 대한 일화, 고참 선수들과의 갈등과 화해, 신진급 선수들을 육성해낸 안목 그리고 서서히 시작되는 구단과의 대립과 마찰을 담담히 묘사하며 신흥 야구 명가 뒤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암과 실에 주목한다. 그 속에서 깨알같이 소개되는 그의 야구에 대한 철학과 소신은 아무 연고도 없던 재일교포 출신이 한국 야구판에서 살아남으며 쟁취한 한줄기 꽃과 같은 결실이자, 끊임없는 도전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원동력임을 증명한다. 때론 고집스러운 징크스와 맹신에 가까울 정도로 데이터에 집착했지만 이는 승리를 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희생했는지 보여주는 다른 일면이기도 하다. 언제든지 생물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게임의 승부 앞에서 김성근 감독은 주어진 임무를 출실히 완수하려는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리더상을 제시해보인 셈이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우후죽순 소개되는 그 어떠한 자기계발서보다 더 확실하고 실용적인 예를 들어보이고 있으며,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이나 [머니볼] 이후 가장 야구를 경영에 잘 접목시킨 서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뛰어난 운영의 노하우를 공개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2012 프로야구에선 더 이상 김성근 감독의 SK 와이번스를 만날 수 없지만, 책 띠지에 쓰여진 문구처럼 '그의 야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 야구팀 고양 원더스 감독으로 퓨쳐스 리그에서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펼쳐보이고 있기에 올해도 어김없이 그의 경기를 만날 수 있다. 오히려 더 과감하고 새로운 모습의 야구와 조우할지 모른다. 마치 2006년 이후 새로 태어났던 SK 와이번스처럼. 조용하지만 강력한 그의 반란과 야신의 컴백을 이 책과 함께 응원해본다.   (고양원더스 공식 홈페이지 : http://www.wonders.kr/)

    (Bill Medley가 부른 영화 [메이저리그 Major League]의 주제가 'Most Of All You'를 김성근 감독님을 위해 띄워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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