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
이용민의 '살인마'영화|애니|TV 2009. 7. 20. 23:43
김기영과 이만희만 있는 게 아니다. 이용민도 있다. [살인마]는 진정 60년대 가장 빛나는 한국 호러/스릴러 중에 한 편일 것이다. 와이드한 화면에 담아낸 공간 연출력과 과감한 동선, 흑백의 음영을 이용한 표현주의적인 디테일에, 거리낌없는 다양한 시각효과까지. 전통적인 방식의 한국 괴담류 스토리를 굉장히 다이나믹하면서도 이질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다. 짜임새 넘치는 구조 또한 참신하고. 호기심을 유발해 끝까지 끌고 가면서 클라이막스를 놓치지 않는 대담한 연출력은 할리우드 뺨친다. 초반 짧은 미술관 씬은 [드레스드 투 킬]을 연상시켰고, 흘러내리는 초상화나 들판에서 귀신들 춤추는 장면을 삽입한 시도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만큼이나 초현실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게다가 여성들에게 무능력하게 휘둘리는 '악역 전문..
-
박윤교의 '마계의 딸'영화|애니|TV 2009. 7. 19. 03:22
80년대 한국 호러는 뒤로 갔다. 그것도 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선 아예 자취를 감췄고. 온갖 장르 영화들이 꽃을 피우던 60년대 독자적인 색채와 미학으로 중무장한 호러는 서슬 퍼런 독재 정부와 TV의 대공세 앞에 길을 잃었다. 김기영이란 걸출한 감독마저 없었다면 퍽이나 암울한 70년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 시기 [며느리의 한], [옥녀의 한], [꼬마신랑의 한], [낭자 한] 등 이른바 '한(恨)' 시리즈를 내며 꾸준히 공포영화를 만든 박윤교 감독. 그 장르에 대한 집착과 노력만큼은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마계의 딸]은 그 80년대 뒤로 간 한국 호러의 좋은 예일뿐, 지나친 동어 반복과 획일적인 모양새로 참신함과 호러의 매력을 잃은 작품이다. 컨벤션한 유치찬란 조명이나 조악한 전자음향, 아크로바틱..
-
권영순의 '대지옥'영화|애니|TV 2009. 7. 17. 02:01
무시무시한 포스를 내뿜는 제목과 달리 무섭지 않다. 지금 보면 엉성하기 짝이 없는 조잡한 효과와 영화의 90% 가량을 어설픈 세트로 커버한 기술적 완성도가 더욱 더 그렇게 만든다. 게다가 불교 법전을 고스란히 답습한 교훈극이라니, [헬레이저]급의 지옥도와 성모럴를 상상했던 내가 너무 앞서 간 듯 싶다. 이건 벳부의 지옥온천을 순례하듯 느긋하게 바라볼 영화였다. 마치 반성에 대한, 회개에 대한 우리네 전형적인 고전 답안과도 같은. 중후반 지옥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낸 비주얼과 불경을 인용해 제리 골드스미스의 'Ave satani'를 연상케 하는 음악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단지 (아무리 사극이라 해도) 지옥을 그렇게 원시적으로만 표현해야 했을까. 군부 독재를 연상시키는 허장강을 보며 비유와 상징, 그리고 신..
-
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영화|애니|TV 2009. 6. 12. 05:10
샘 레이미가 돌아왔다. 공포영화로. 오매불망 [이블데드]를 기다리며 그의 복귀를 바라던 호러팬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그간 할리우드에서 이뤄낸 성공을 뒤로 한 체 그는 초심으로 돌아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확실하게 지장을 찍는다. 나 변하지 않았소 하고. [드래그 미 투 헬]은 그 확실한 서명이자 팬서비스고, 자기복제인 동시에 성공한 자만의 유쾌한 여유가 있다. 여전히 그는 잔인하고, 웃기며, 빠르고, 막간다. 카메라는 짖궂고, 편집은 강렬하며, 아날로그 효과에 CG가 다소 늘었지만, 무시무시한 공포는 그대로다. [드래그 미 투 헬]는 신나는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이다. 맘 놓고 웃고, 맘 놓고 소리 질러라. 무서우면 옆 사람 손을 잡아도 좋고, 신나게 떠들어라. 그래도 이 영화의 빠빵한..
-
알렉스 프로야스의 '노잉'영화|애니|TV 2009. 4. 20. 21:21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로 다가올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 걸 들은 적이 있다. 그 기저의 밑도 끝도 없는 미지의 공포감이 무의식적인 자기방어와 싸우고 있기 때문에 우울증과 무기력함, 두려움이 유발되는 거라고. 알 수 없는 혹은 너무나도 잘 아는 인간의 엔딩에 대한 막을 수 없는 무기력함에서 불안이 삶을 잠식하는 거라고 말했다. 알렉스 프로야스의 '노잉'에서 오는 공포의 기시감은 바로 그것이다. 파국와 결말을 알기 때문에 오는 너무나도 탈종교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임사 체험과도 같은 공포감. 두려움 그리고 또 다른 희망. 그의 앞선 영화들(크로우와 다크시티, 아이로봇)과 마찬가지로 느껴지는 종교적인 색채는 여기서 더욱 두드러져 더 강한 의미와 반감을 선사하며 다크한 충격파를 안..
-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Z'책|만화|음악 2008. 10. 5. 23:35
가상 역사 소설은 많지만, 이처럼 좀비물에 대입해 다양한 콜라주를 뽑아낸 작품은 없을 것이다. 조지 로메로의 좀비물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이 소설은 필경 우습고 잔학하게 보일지 몰라도 어설프게 고어적인 효과만을 노린 단순한 공포물이 아니다. 윤리적이고 공황적인 딜레마를 다루며 인간과 사회에 짙은 페이소스를 던져준 로메로의 (초기) 좀비 3부작처럼 리얼하고 풍자적이며 사색적인 뉘앙스를 진하게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류 인플루엔자와 광우병 같은 바이러스가 설치는 현 시점에서 좀비는 그런 것들에 대한 점잖은 은유일런지도 모른다. 인터뷰와 보고서라는 구체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생생하고 다양한 시선을 담고 있으며, 현실의 국제 정서나 각 나라별 현황들을 꼼꼼하게 다뤄 가벼이 읽히기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중..
-
공수창의 'GP506'영화|애니|TV 2008. 4. 3. 06:39
[알포인트]는 전형적인 장르 영화에서 한발 빗겨난 공포와 스릴 그리고 처절한 감정과 반목을 다룬 휴먼 드라마였다. 호러의 탈을 쓴 채 추악한 진실의 이면을 가리키는 그 속엔 전쟁의 무의미한 살육과 소속의 압박 그리고 정서적 공황을 맨살 드러내듯 부끄럽게 고백하는 진솔한 울림이 들어있다. 공수창을 안병기나 다른 호러 신인 감독들과 다르게 만든 건 우리네 아픈 기억을 건드릴 줄 아는 날카로운 시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번째 군대 호러 [GP506]은 군의문사라는 묵중하고 좋은 소재를 다뤘음에도 행군하다 길 잃은 부대원마냥 엉뚱한 곳을 헤매인다. 폐쇄된 공간 속에 담긴 진실하고도 추악한 본질을 포기한 채, 껍데기만 남은 공포와 스릴를 쫓기에 급급한 것. 진짜로 무서운 건 깜짝 놀랄 만한 사운드와 ..
-
어둠 속의 공포.잡담 2007. 10. 16. 03:48
예전에 살던 20여년이 넘은 집 부엌엔 바퀴발레가 살았다. 득실거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밤에 불을 켜면 교실에서 장난치다 선생의 등장에 후다닥 앉는 양마치마냥 어둠 속으로 몇마리가 기어가곤 했다. 약 뿌리고, 끈쩍이 놓고, 연막탄도 써봤지만, 살아있는 화석답게 쉽게 사라질 족속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낮엔 거의 보이질 않으니 생활하는데 그리 큰 불편은 못 느꼈다. 특별히 무섭다 생각치도 않았고. 근데 그 날따라 밤에 배가 고팠다. 야식이 자꾸 땡기는 거라. 참다 참다 도저히 참아서 난 형과 함께 부엌으로 내려갔다. 불을 켜기 전 무의식적으로 발을 내밀었는데, (그날따라 양말도 안신었다!) 무언가 발에서 빠찍! 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201 순간접착제처럼 순식간에 굳는 몸, 온 몸에 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