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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어스 브라운의 '레드 라이징'
    책|만화|음악 2015. 12. 10. 07:32

    며칠간 책과 먼 생활을 해왔더니 문득 글이 읽고 싶어졌다. 내가 쓴 거 말고, 인터넷 기사나 댓글 말고, 실용서적 참고서적 말고, 새롭고 아주 긴 이야기가. 그런 바람을 들어주기나 한 듯 마침 가제본 서평 이벤트에 당첨돼 읽게 된 건 무지 두껍고도 이제 갓 출간된 소설이었다. [파리 대왕]의 [헝거 게임] 버전이라는 아주 그럴듯한 태그라인이 붙은 이 소설의 제목은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의 장편 데뷔작이라 했다. 신선한 이야기에 목마른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달라붙어 영화화한다는 소식보다 사실 더 끌렸던 건 SF 성장담이라는 장르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나니까 SF라고 부르기는 다소 민망하지만, 성장담에 방점을 찍고 있는 이 이야기는 한참동안 인기를 끈 [해리포터]를 위시한 [트와일라잇], [헝거 게임], [다이버전트], [메이지 러너], [섀도우 헌터] 등과 같은 영어덜트 소설 범주에 놓여있다. 아직 스무 살이 채 안 된 십대 아이들의 전광석화와 같은 그 시기의 질풍노도 투쟁과 로맨스를 담아낸 이런 소설들은 대부분 비슷비슷한 구성을 가지면서도 색다른 캐릭터들과 사연, 그리고 독특한 컨셉으로 변주돼 계속 찾게 만드는 마력이 숨어있다. 김용의 무협지를 끝내면 와룡생, 고룡, 양우생 등으로 넘어가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자의 갈증과 허기를 풀어주는 무한한 장르의 보고인 셈이다. [레드 라이징] 역시 선배들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그 공식과 과정을 착실히 밟아나는 모범적인 후배 역할을 해내고 있다.

    페이지를 넘기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파리대왕]의 [헝거 게임]이라는 태그라인과 달리, 에드거 라이스 버로우의 [화성의 프린세스]와 올슨 스콧 카드의 [엔더의 게임]이었다. 전자는 무대가 화성이라는 점에서, 또 지구에서의 자기 자신을 벗어나 화성의 새로운 이방인으로 다시 살아가는 모티브가 레드에서 골드로 변모하는 주인공 대로우의 운명과 비슷하게 느껴졌다면, 후자는 어른들을 상대로, 또 약점이 많은 하위 계급에서 자신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롤이 겹쳐보였다. 물론 기관에서 모의 전쟁을 치루는 중후반부는 영락없는 [헝거 게임]과 [메이지 러너] 등의 근래 디스토피아적인 영 어덜트 소설들의 유행과 규칙을 따라가고 있지만, 신화적인 명칭과 이름,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계급과 차별적인 신분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묘미도 갖고 있다. 가장 하위 신분인 레드가 최상위 계급인 골드 무리 속에 섞여 들어가 혁명을 꿈꾼다는 점에서 전복적인 재미를 갖는 동시에, 언제 정체가 탈로나지 않을까에서 오는 긴장과 스릴도 공유하고 있다. 또한 그를 도와주는 세력 중에 하나인 ‘아레스의 아들들’에 대한 호기심과 골드 세력에 대한 결말부의 강력한 떡밥 등이 얽히며 시리즈 전체에 대한 기대감과 스케일을 키우게 만든다. 무엇보다 [레드 라이징] 전체에 깔려 있는 주인공의 동기는 강력한 복수심이고, 그 복수를 이루기 위해 적의 탈을 뒤집어 써야한다는 아이러니를 감내해야 된다는 점에서 [페이스오프] 식의 딜레마를 전반에 깔아 시종일관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단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독자와 가장 거리감이 적어 감정적으로 이입하기 쉽다는 1인칭 주인공 시점임에도 가독성이 떨어지는 껄끄러운 문장들이 우선 가장 아쉽게 다가온다. 대부분의 문학작품들이 과거형 시제와 현재형 시제를 적절히 혼용하며 감정과 배경들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반해, 거의 대부분이 현재형 시제로 진행되는 [레드 라이징]의 문장들은 낯설고 기이하다. 대략 이런 식이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느껴진다. 나는 댄서가 준 칼 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호흡을 해 격분을 가라앉힌다. 나는 순교자가 아니다. 나는 복수가 아니다. 나는 이오의 꿈이다. 그래도 이오를 살해한 자가 고소해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배신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투박하고 직설적인 어투의 단문들이 많아 아무래도 까끌까끌하게 느껴진다. 물론 주인공 대로우가 가장 하위 계급의 천박하고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상스러운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상위 신분인 골드가 되어도 여전히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이게 맞는 추측 같진 않아 보인다. 이런 생경한 화법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 분량이 700페이지에 이르니 익숙해지기엔 꽤나 넉넉한 시간이긴 하다 – 영화 시나리오를 읽듯 생생한 묘사와 박력을 느낄 수 있긴 하다. 또한 생소한 용어들에 대한 주석이라던가, 많은 등장인물에 대한 간략하고도 친절한 소개 정도가 첨부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 라이징]은 재밌다. 뻔하고 식상한데,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에 젖는데 페이지는 야속하게 줄어만 간다. 무협지나 판타지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재미를 보장하는 성장담이 투박스럽지만 튼실하게 직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무협지에서 하나의 무공을 획득하고 내공을 늘려갈 때마다 쾌감이 들 듯, 여기서 대로우가 동맹을 맺고 동료를 얻으며 죽음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주먹이 절로 쥐어진다. 단순한 혁명이나 반역을 넘어 복수극을 기저에 깔고, 새로운 위장 신분으로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 세력과 규합해 역모를 도모해야 하는 주인공의 고독한 선택과 결단을 지켜보는 일이 꽤나 즐겁다. 살아가기에 또 변화했기에 그 속에서 다시 사랑과 우정을 마주쳐야 하는 대로우의 얄궂은 운명을 바라보는 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그게 바로 독자만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프랜차이즈의 등장에 이전 다른 시리즈들처럼 또 후속작을 목 빼고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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