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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우의 '주변인'
    책|만화|음악 2013. 6. 19. 22:08

    1집만이 주는 묘한 설레임이 있다. 그전엔 전혀 듣지 못한 새로움이 주는 쾌감이다. 방향성과 색깔을 발견해가는 재미다. 그의 혹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동질화 돼가는 교감의 시간이다. 디지털 싱글이나 앤솔로지 앨범에서 만났던 파편에서 벗어나 온전함과 마주한 기쁨이다. 갓 나온 CD와 속지 잉크의 따뜻한 내음이다. 패기와 열정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을 뒤로 한 채 나선 신인의 자존감이다. 1집 정규 앨범엔 그 모든 게 얽혀 기묘한 흥분을 안겨준다. 낯선 커버 이미지부터. 내지를 쓰윽 눈으로 훑어보며. 뻑뻑한 CD를 꺼내 음악의 무게를 가늠하고. 첫 음이 이어폰에서 새어나올 때까지.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기대감과 불신이 교차한다. 때론 찌푸리고 난해함에 몸을 떨어도, 기시감과 익숙함의 간극에서 벗어난 충격의 도돌이표가 마구 몰아친대도 그 느낌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놀이동산 속 귀신의 집 입구를 바로 앞에 둔 심정처럼. 그게 1집의 짜릿함이다. 이진우의 첫 앨범을 받아들었을 때도 마찬가지 기분이었다.

    '루시드 폴'과 '마이 앤트 메리'를 사이좋게 반반씩 섞은 듯한 이진우 1집은 담백하고 알싸하다. 사색적이고 헛헛한 느낌만 없다 뿐이지 나지막하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개인적인 일상과 추억, 연인과 사랑에 대해 소소히 풀어내는 건 '루시드 폴'을 연상케 하고, 강렬하진 않지만 시원하고 편안한 모던락 밴드 사운드로 외피를 두른 건 '마이 앤트 메리'나 '델리 스파이스'와 닮아있다. 하지만 그들보다 젊고 신선하며, 긍정적인 기운과 친숙한 시선으로 자칫 어두워질 수 있는 주변인의 경계와 무게를 대중적으로 풀어낸 산뜻한 감각은 인상적이다. 모든 곡의 연주에 다양하게 참여하며 원맨밴드로서 가능성을 타진하지만, 그 에너지를 발산하며 폭발시키기보단 삭히고 관조하며 반추하는 톤으로 이질적인 조화를 꾀하고 있다. 따라 고조되는 연주와 달리 단조로울 정도로 가라앉은 창법은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되었다. 신인답지 않게 노련하고 완벽하게 조율하고자 오랫동안 매만진 사운드는 화려하진 않지만 단단하고 충실하다. 너무 꽉 잡혀 조금은 신인다운 헐렁함이 보이길 바랬을 정도로 계산적으로 느껴지는 게 흠이라면 흠.


    총 12트랙, 40여분에 이르는 그의 앨범은 강렬한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해 여름'을 부르며 시작한다. 가녀린 보이스컬러가 락킹한 연주에 안 어울릴 듯 싶지만 의외로 강렬한 여름 햇살 아래 펼쳐졌던 풋풋한 기억을 상징하듯 싱그럽고 찬란하게 다가온다. 자신의 스타일을 명확하게 인식시켜줄 기분 좋은 모덕락. 그 뒤를 잇는 '그때, 우리'은 분위기를 바꿔 달달하고 서정적인 감성을 전달한다. 토이와 보컬 이지형을 얼핏 떠올리게 하는데 그보다 조금 더 달고 감상적이다. 영롱한 신디 음색이 전면에 나서 추억을 되새기는 저음의 목소리와 상충되며 묘한 긴장감을 조성해낸다. '아홉 번째 창가자리'는 학창시절을 그리워하는 락발라드 넘버. 내지를 법한 감정을 중간 기타 전주로 대신 풀어낸 채 차분히 추억을 반추한다. 일상 속 허전한 빈자리를 느끼며 익숙해지려는 심정을 소소하게 풀어낸 '보통의 하루'는 어쿠스틱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모던락으로, 강력한 후킹은 없지만 담백하고 서정적인 톤으로 자신을 위로해준다.

    잠시 쉬어갈 타이밍에 위치한 '사진'은 피아노와 기타, 더블베이스가 어우러진 짧은 연주곡으로 아련한 사진을 보듯 감성적인 부분을 자극한다. 영화음악 큐처럼 이미지와 스토리를 담고 있는 듯 하다. 보사노바 리듬에 '캐스터'의 융진을 객원 보컬로 참여시킨 '새벽 정류장'은 앨범에서 가장 튀는 듀엣곡이다. 투명한 그녀의 목소리와 이진우의 회색톤이 잘 매칭을 이루며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을 담백히 주고받고 있다. 톤의 절제와 달리 나긋나긋한 봄기운의 리듬은 향긋하다. 다시 첫 트랙의 상큼함으로 돌아간 '봄의 시작'은 이 앨범의 타이틀 곡으로 시원스런 기타결과 투명한 멜로디라인이 듣기 좋은 모던락이다. 설레는 사랑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풋풋한 가사와 이를 봄의 시작에 비유한 제목이 페퍼민트 향처럼 느껴진다. 분위기를 급반전시키는 '사랑은 이별을 부른다'는 본 앨범에서 가장 어두운 곡으로 단조로운 피아노에서 출발해 점점 감정이 고조되어가며 후반에 이르러선 드라마틱하게 휘몰아친다. 하지만 팍! 터져나오는 기타의 폭풍질주와 달리 '어쩔 수 없죠' 체념하고 절제하는 보컬의 조화는 이별이란 원래 그런 이율배반적이란 것임을 농축적으로 표현해 쓰디쓴 느낌을 배가시킨다.


    그런 우울한 뒷맛을 치유하는 건 알록달록 당의정 같은 '숨은 그림 찾기'다. 조금 덜 느끼한 성시경 혹은 조금 밝은 루시드 폴의 감성으로 정갈하니 일상 속 주변인들의 시선을 노래하는 이 곡은 본 앨범에서 가장 대중적인 트랙이다. 멜로디도 편곡도 수줍은 가사가 주는 울림도 깔끔하고 세련된 게 좋다. 어른이 되어가는 고총을 귀엽게 토로하는 '소년 에필로그'는 전체 수록곡 중에서 그나마 가장 거칠고 변화무쌍한 진행을 보인다. 다소 범생틱하게 느껴질 만큼 정갈한 사운드를 고수했던 터라 이런 조금의 변화나 시도가 반갑게 느껴진다. 조금은 더 다양한 시도와 파격을 단행해도 좋지 않을까. 피아노와 스트링으로 이루어진 서정적인 짧은 연주곡 '재회'를 지나면 마지막 트랙 '널, 그리다'가 기다린다. 평이하고 반복적인 진행이지만 그래도 지겹게 느껴지지 않는 건 주문과도 같은 멜로디가 주술처럼 그리움을 부각시키고, 아련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한 몽롱함을 선사하기 때문이리라. 하루를 되새기며 누군가를 떠올리고 잠에 빠질 일과의 마지막, 그 여운을 짙게 남기는 곡이다.

    파스텔 뮤직에 걸맞는 데뷔작이다. 이 반듯한 매력남 이진우의 첫 앨범은 1집만이 가진 매력과 재미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설렘과 흥분, 도전과 떨림이 가득한 이 싱그러운 노래들은 자신이 좋아하던 뮤지션들을 쫓아 멈추지 않았던 그의 고뇌와 노력, 그리고 색다른 시선의 결실이다. 긍정적인 기운과 서정적인 감성이 충만한 모던 락을 매끈하게 선보인 그는 앞으로의 행보가 더 기대되고 주목된다. 이제는 주변인이 아닌, 주인공으로서 활약할 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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