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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희경의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책|만화|음악 2013. 4. 15. 04:18

    노희경의 드라마가 눈에 띈 건 [거짓말]부터였다. 지금은 그녀의 페르소나가 된 배종옥과 유호정, 이성재, 김상중, 추상미, 김태우 그리고 윤여정과 주현이 나온, 1998년 상반기에 조용하고도 쓸쓸히 방영된, 히트와는 비교적 거리가 먼 작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이전의 그녀가 맡은 단막극들은 잘 생각나지 않고, 다른 연속극들 또한 아직 '노희경표 드라마'라는 영광스런 딱지가 붙지 않았었다. 물론 열성팬으로서 유심히 그리고 꾸준히 지켜봤다면 몇몇 단초들을 발견하고 기뻐했겠지만, 그때만 해도 그녀는 아직 드라마 폐인들을 양산하고, 대본집이 꾸준히, 유일하게 출간될 만큼의 작가로 성장하리라 예상하기 어려웠다. 희미하고 비슷하며, 여물지 않고 단단치 못했다. 게다가 그 당시 드라마는 범람하는 수많은 전파들 사이에서 스쳐지나가는 짧은 인연 정도로 그저 소비되는 경향이 더 컸었다. 다시보기나 웹하드 다운로드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에 이르러서 노희경은 비로소 우리가 아는 노희경이 되었다. 시청률에선 그다지 환영받을 만큼의 안정적인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더 주목받게 되는 이상하고도 대단한 작가가 되어갔다.

    [바보 같은 사랑], [화려한 시절], [고독], [꽃보다 아름다워]와 [굿바이 솔로],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세상]과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 등에 이르기까지 노희경은 일상적이지만 가슴을 찌르는 날 것의 대사로 외롭고 상처받은 인생과 사랑 그리고 가족을 돌아보고 치유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비슷했고, 그 속의 인물들 또한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냈다. 그녀는 출생의 비밀과 재벌가의 암투, 불치병과 사이코드라마보다 더 센 고부갈등, 역사 속 이야기들은 고이 접어두고 현실 속 휴머니즘에 골몰한다. 외롭고 쓸쓸하고 간절하며 애타는, 진부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기본적인 감정과 오해, 그에 대한 반응과 생각들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관찰하며 누구에게나 공감 가는 인물들과 이야기를 직조하려 한 셈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결과물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대한민국 어느 작가도 노희경의 인물과 대사를 만들지 못했다. 그 깊이와 울림은 쓸모없기만 한 바보상자도 썩 그럴 듯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그렇게 가끔 만나는 좋은 드라마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해 일취월장한 자녀와 마주하듯 뿌듯하고 시큰하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이 쓴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작품을 골랐다. 일본에서 높은 인기를 얻은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노희경 식의 첫 번째 번안극이다. 그녀는 왜, 어째서 지금 새로운 도전을 한 걸까. 그 해답은 드라마가 끝난 시점에 받아든 시청률과 그 타이밍에 출간된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대본집에 있지 않나 싶다.

    벌써 여섯 번째 대본집이다. 북로그컴퍼니에서 나온 [그들이 사는 세상]과 [거짓말], [굿바이 솔로] 그리고 단막극 4편이 담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과 르네상스에서 출간된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에 이은. 대한민국 어느 작가도 자신의 극본을 TV가 아닌, 다른 매체로 전환해 상업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대한민국 드라마는 순간 공유되었다 휘발되고 마는 재미와 감정의 드라이아이스였다. 뜨겁고 차갑지만 실체는 잡히지 않는, 모호하고도 기묘한 상품과도 같았다. TV를 벗어나는 순간, 그 생명력은 갑작스럽게 시들고 말았다. 그러나 노희경의 대본은 그렇지 않다. 글로 읽어도, 활자화 되어도 여전히 그들은 그 페이지 안에서 배우들의 외피를 뒤집어 쓴 채 똑같이 몇 십번 반복해서 잔인하게 주어진 삶을 생생하게 살고 있다. 어제의 나를 보듯, 내일을 나와 만나듯 숨을 얻고, 관계를 맺으며, 화내고 웃으며 생각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그 보편적인 감정의 [거짓말]이 좋았고, 그 일상의 [그들이 사는 세상]이 맘에 들었으며, [굿바이 솔로]도 드라마와 똑같이, 또 색다르게 상상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문제는 지금 내 손에 들린 그녀의 여섯 번째 대본집인 [그 겨울 바람이 분다]다.

    그녀가 직접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곤혹이었고, 혼란이었던 이 리메이크는 그녀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작위적이고 도식적인 설정도 그렇고, 우리와는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열도의 낯선 감정 기재와 정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원작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 자체도 그렇다. 뇌종양에 걸린 눈 먼 상속녀, 갓난아이 때 벌려진 호스트, 그를 동경하는 후배와 돈 때문에 뇌종양을 방치하는 늙은 여집사. 만에 하나 일어날까 말까 하는 이 공상만화 판타지스러운 세팅이 진짜 과연 정말로 노희경 작가의 차기작이 맞단 말인가! 짜장면에 돔페리뇽, 푸아그라에 막걸리만큼이나 괴상한 조합으로 보였다. 드라마가 끝난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실패했다. 드라마는 인간이다. 작가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말한 그녀는 자신이 이해하는 사람만 이해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나 싶어 그 편협함을, 그 꼰대 감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쓰기를 작심했다는데, 그 가치관의 혼돈과 당위성을 찾기 위한 작가의 치열하고 고독한 전투가 드라마 내에 여실히 투영되었다. 이로 인해 극적인 개연성은 흔들리고,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았던 세밀한 관찰력과 주옥같은 대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대신 인물과 그 배경에 대한 집요한 고민과 복기만이 패잔병처럼 남았다. 승리했지만 진 것 같은 기분의 드라마, 그것이 [그 겨울 바람이 분다]였다. [아이리스 2]과 [7급 공무원] 사이 시청률 경쟁에서 이겼지만, 노희경 자신으로선 패배한 드라마였다.

    그 실패를 담았기에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대본집은 흥미로웠다. 아쉽게 1권만 나와(2권은 4월 중순 발매 예정이란다) 엔딩의 그 휑한 결말을 어떤 식으로 글로 담아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그녀만의 고민과 애증이 표현됐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치기어리고 서툴러도 상관없다. 자신만 떳떳하다면. 노희경 작가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로 성공 같은 실패를, 실패 같은 성공을 거뒀다. 하긴, 뭐 전엔 안 그랬나. 그녀의 드라마들은 항상 그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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